‘20세기 소년’은 ‘몬스터’ ‘해피’ ‘야와라’ ‘마스터 키튼’ 등의 작품으로 많은 팬들을 거느린 우라사와 나오키의 신작이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만화의 장점을 가장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로 우리나라에도 청소년 팬과 20∼30대는 물론 40대 이상의 열혈 팬들도 적지 않다.
얼굴과 스타일만으로 타인과 구분되는 일반적인 만화 영웅들과 달리 평범한 동양적 ‘얼굴’의 주인공들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동질감을 준다. 스타일이나 비트보다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타고난 이야기꾼의 재질 역시 작가의 강점이다. 칸과 칸의 연결이나 앵글 연출 등은 최근 다른 만화에서 보여준 현란함 대신 편안한 컷트를 선호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상승 고조되는 시점에서 캐릭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매력적인 서스펜스다.
‘20세기 소년’은 우라사와 나오키류의 백과사전형 작품이다. 백과사전이라고 해서 함량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몬스터’의 미스터리한 추격의 구조와 ‘해피’ ‘야와라’ 등에서 볼 수 있는 개성적인 인물들의 명랑한 관계, ‘마스터 키튼’에서 언뜻 비치는 스산한 서글픔을 안고 사는 캐릭터들이 한 작품에 들어와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이 멋들어진 제목이라니! 20세기 만화가 21세기를 꿈꾸며 판타지를 주조했다면, 이 만화는 20세기와 다를 것 없는 21세기에서 20세기로 다시 거슬러올라간다.
달에 인간이 첫발을 내딛던 69년 소년들은 들판에 비밀기지를 만들고 롤링스톤즈의 로큰롤을 들으며 인류를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 싸울 시나리오를 만든다. 그러나 97년, 지구를 지키려던 소년들은 누나가 버린 아이를 키우는 편의점 주인이나 팬시숍 주인, 공업고교 교사나 공항에서 마약을 탐지하는 세관원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한 97년의 일상에 느닷없이 69년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소년들이 만든 비밀결사의 마크가 등장한 것. ‘친구’라는 존재가 이끄는 의문의 조직과 멸망의 시나리오가 69년 소년들의 시나리오와 일치하기 시작하고, 주인공 켄지는 편의점 주인에서 69년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대로 세계를 구할 운명의 세례를 받는다. 희미하게 잊혀진 과거의 기억이 오늘을 규정하고 움직여간다는 사실, ‘20세기 소년’의 재미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바람처럼 흘러가 내 곁에서 사라진 기억들이 오늘의 서스펜스를 만들고, 체인점 직원에게 쩔쩔매던 편의점 주인이 69년에 꿈꾸던 스펙터클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 만화는 30대를 위한 만화다. “내 인생은 이걸로, 이러면 된 거다”고 생각하는 30대의 꿈을 되돌리는 만화다.
박인하(만화평론가)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