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은 일제 압제와 동족 상잔 등 사회적 격랑 한 가운데를 살았던, 이른바 ‘고생한 세대’에 속한 사람이다. 그림을 거들떠보는 사람들이 없던 시절에 그림 그리기란 남들 눈에 벌 받을 짓으로 비치기 십상이었고, “평생 그림 그린 죄 밖에 없다”는 만년의 푸념처럼 스스로 살펴봐도 사서 고생인 천형(天刑)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참으로 묘하고 재미있는 것이 역설적 사단(事端)도 자주 생겨난다는 점이다.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난다는 말대로 진흙탕에서 연꽃이 솟아나고,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이중섭이나 박수근도 그랬지만, 돈을 만든다는 잡념은 아예 떨쳐버리고 그림을 백안시하는 세태 속에서도 오로지 아름답고 착한 세계를 그리는 일이 즐거움이자 보람이라 확신하고 그 길로 한 평생 정진했다.
장욱진이 즐겨 그렸던 화제(畵題)는 자연이 생생한 농촌풍경이었다. 새가 날고, 농가 식구들인 소 개 등이 어슬렁거리는 사이로 아이가 뛰놀고, 어른은 한가롭다. 황금사냥에만 골몰하는 한국인 눈에는 농촌출신이지만 도시산업시대를 오래 살았던 화가의 그림이 현실을 직시치 못한 과거 회귀로 보일지 모르나, 이건 장욱진 그림을 제대로 보는 방식이 아니다.
한번도 사실화를 그려본 적이 없는 화가로서 오히려 현실에서 이상을 보려했고, 하루 하루의 각박한 삶에서도 꿈을 잃지 않은 경지를 그리고 싶어했다. 이를테면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개는 시골 마당을 마구 뛰어 다니는 놈이 아니라 여덟 팔자 걸음을 배운 자못 명상적인 견공(犬公)으로 태어나고 있다.
“개도 불성(佛性)이 있다”던 중국 조주(趙州)선사의 말처럼, 가축조차도 영적 존재로 바라본 장욱진의 시선을 말해주는 물증인 것. 세상이 변해 어느덧 환경주의가 득세하고, 지구 생물 모두가 세상에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고 보는 생명주의마저 시대의 공감을 얻게될 것을 미리 내다 본 혜안이 아니겠는가.
한편 산업근대화의 당위성을 믿고 그 사이 백성들이 한결같이 입에 풀칠한다고 한 눈 팔지 않고 바삐 뛰었는데, 지금은 광속(光速)의 전자환경을 헤쳐가야 한다고 도처에서 나팔을 불고 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삶의 본연일까 하는 반성의 소리도 높다.
유명 시계회사가 일본사람에게 물었더니 누구나 바빴던 20세기의 상징 한자는 ‘바쁠 망(忙)’, ‘움직일 동(動)’, ‘흐를 류(流)’의 순서였다. 21세기에 기대하는 대표 한자는 ‘즐거울 낙(樂)’, ‘꿈 몽(夢)’, ‘한가할 유(悠)’를 순서대로 꼽았다.
바로 장욱진 그림이야말로 살아있는 자연 속에서 한가롭되 즐거운, 꿈이 어린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세상은 한 번 잠시 왔다가는 소풍길인데,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위인인지 헤아리지 못한 채 정신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에게 경종으로 다가오는 그림이다.
김형국(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