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자세상]아버지의 '술서리'

  • 입력 2001년 1월 22일 16시 27분


회사원 O씨(46)는 해마다 이 때면 30여년 전 중학생 시절의 어느 설날을 떠올린다.

50세를 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난 아버님과 함께 잘사는 친척집에 세배를 갔을 때였다. 홀로 월남한 아버지가 향우회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유일한 친가쪽 어른이었다. 아래층에 손님들이 많아 2층에 올라가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O씨의 아버지는 이리저리 둘러 보다 고급 장식장에서 반쯤 담긴 양주병을 꺼내 병뚜껑에 한잔을 따라 ‘홀짝’ 들이켰다. 그리곤 멋쩍은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본 뒤 술병을 원래 자리에 올려놓았다.

‘충격’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성실했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듣던 아버지가 술을 ‘훔쳐’ 마신 것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누가 볼세라 급히 양주 한잔을 들이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O씨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40대에 접어들면서 O씨는 매년 설날과 제사 때면 양주 한 병을 준비한다. 아버지가 즐겼던 소주 한 잔과 양주 한 잔을 번갈아 따르며 아들은 아버지를 추억한다.

<오명철기자>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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