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운보 김기창화백]붓으로 말한 '한국의 畵仙'

  • 입력 2001년 1월 25일 18시 37분


부인이 막내딸을 잉태했을 무렵 운보가 우연히 그렸다는 그림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부인이 막내딸을 잉태했을 무렵 운보가 우연히 그렸다는 그림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23일 타계한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화백은 전통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하며 2만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긴 ‘한국화의 1인자’였다. 또한 청각 장애를 예술을 통해 뛰어넘은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상실한 그는 그림에 온 힘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던 자신의 처지를 “가슴에 응어리진 피눈물의 표현이지. 날뛰고 포효하고 내닫고 울음 울고 하는…”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그림 입문 직후 곧바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화가 박래현(朴崍賢)과 열애 끝에 46년 결혼했다. 둘은 결혼할 때 “작품활동에서 서로 협조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며 평생 이를 지켰다.

그는 76년 부인의 타계 이후 더욱 작품에 몰두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개월 만에 완성한 ‘바보산수’는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현재 1만원권 화폐에 들어 있는 세종대왕의 얼굴은 그가 75년에 그린 것이다.

그는 그림으로 얻은 부(富)를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위해 썼다. 86년 한국청각장애자 복지회를 창립하는 한편 청각장애인 복지시설인 청음회관을 개관한 것. 그는 이 같은 공로로 91년 인촌상을 수상(공공봉사 부문)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남을 위한 봉사”라는 말을 남겼다.

84년 충북 청원군에 ‘운보의 집’을 세우고 살아온 그는 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해왔다. 99년 옷로비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작품이 ‘로비용’으로 쓰였다는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7월 열린 ‘운보 바보예술 88년’전에 트레이드마크인 ‘흰 고무신에 빨간 양말’을 신고 전시장에 나타나 건재를 과시했다. 12월에는 남북이산가족상봉단의 일원으로 북에서 온 동생 기만(基萬·72)씨를 50년 만에 만났다.

그는 이달 초 갑자기 병원에서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했다.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듯하다.

후배화가인 서울대 미대 이종상(李鍾祥)교수는 “더 오래 사시면서 한국 화단을 이끌어야 했다”면서 “가뜩이나 형편이 어려운 국내 화단이 더 침체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아쉬워했다.

▼ 운보 막내딸 '사랑의 수녀' 대물림 봉사 ▼

23일 타계한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화백의 빈소에는 유족 가운데 수녀 한 명이 조문객을 맞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운보의 1남 3녀 중 막내인 딸 김영(金瑛·45)씨.

그의 수도명은 ‘아나윔’(‘가난한 자’라는 뜻). 인도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세운 ‘사랑의 선교수녀회’ 소속이다.

아나윔 수녀는 이 수녀회가 경기 안산에서 운영하는 무의탁 노인시설인 ‘평화의 집’에서 3년간 원장으로 일하다 이달 초 같은 노인 시설인 인천 ‘온정의 집’으로 옮겨 병들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그는 수도여사대(세종대 전신) 동양화과를 나왔으나 청력 마비가 된 아버지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며 1983년 봉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수녀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어머니인 화가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이 그를 잉태했을 무렵 운보는 우연하게 성당 앞에서 한 수녀가 비둘기를 안고 하늘을 쳐다보는 그림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그렸다.

딸이 수녀가 되겠다고 처음 말했을 때 운보는 이 그림을 생각해 내고 하느님의 계시가 있다고 직감하며 수녀의 길을 쾌히 승낙했다는 것. 운보는 이 그림 속의 수녀가 아나윔 수녀를 꼭 닮았다고 주위에 여러 번 말했다.

이 그림은 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기증해 현재 로마 바티칸에서 소장하고 있다.

딸의 영향으로 운보는 1985년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다.

아나윔 수녀는 “아버님은 모든 슬픔과 회한은 당신께서 끌어안으시고 새로운 세기의 희망만 우리 몫으로 남겨 주기 위해 음력으로 2000년 섣달그믐에 돌아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 빈소 스케치 ▼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운보 김기창 화백의 빈소에는 설 연휴에도 불구하고 조문객들이 몰려 한국 화단의 큰별이 졌다며 애도했다.

○…빈소를 찾은 인사들은 김수환(金壽煥)추기경, 오광수(吳光洙)국립현대미술관장, 박석원(朴石元)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

이어 한국화가 이종상(李鍾祥) 신영상(辛永常) 송수남(宋秀南) 이규선(李奎鮮) 심경자(沈敬子) 곽석손(郭錫孫) 서정태(徐政泰)씨, 서양화가 권옥연(權玉淵) 김구림(金丘林) 이두식(李斗植)씨, 미술평론가 이규일(李圭日) 최병식(崔炳植)씨, 갤러리 현대 박명자(朴明子)사장과 상문당 박우윤(朴雨潤)대표, 농아인협회 관계자 등이 조문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김병관(金炳琯)동아일보 회장, 삼성출판사 김종규(金宗圭)회장 등도 조화를 보내 고인을 추모.

○…김수환 추기경은 23일 타계 소식을 듣고 곧바로 빈소를 방문. 김 추기경은 1985년 경기 의왕 성 라자로 마을에서 운보에게 ‘베드로’라는 영세를 준 뒤 “성미가 급한 것이 베드로를 꼭 닮았다”고 운보에게 농담을 건넸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의 인연으로 김 추기경은 지난해 말 운보의 병실을 찾는 등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다.

○…분향소가 차려진 충북 청원군 ‘운보의 집’에는 제자인 조평휘(趙平彙·70)목원대 명예교수와 정명희(鄭蓂熙·57)한국기독교미술관장, 운보를 간병해 온 박태근(朴太根·50·여)씨 등이 빈소를 지켰으며 나기정(羅基正)청주시장과 변종석(卞鍾奭)청원군수 등이 조문했다.

<윤정국기자>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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