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紅疫(홍역)

  • 입력 2001년 1월 30일 18시 45분


옛날 人口 減少(감소)의 要因으로는 전쟁과 자연재해, 그리고 傳染病(전염병)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 이 중 하나라도 있게 되면 人口가 현저하게 減少했으며 반면 운 좋게 피해 가는 때면 太平聖代는 ‘떼 논 堂上’이었다. 역설적으로 太平聖代는 人口의 급격한 增加(증가)를 불러와 결국은 ‘먹는 문제’가 대두돼 다시 亂世(난세)가 찾아들게 되어 있었다. 사실 중국의 5000년 역사를 ‘一治一亂’으로 묘사하는 것도 알고 보면 사람의 입, 즉 ‘人口’의 增減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역사를 뒤적여 보아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일례로 조선시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간 전염병이 무려 79차례나 휘몰아쳤고 그 결과 어떤 해에는 인구의 7.8%인 50만명 이상이 죽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오랑캐보다도 더 무섭다’고 했을까.

그 傳染病을 疫病 또는 染病이라고도 했으며 반 우리말로는 ‘돌림病’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이 놈이 한 번 ‘돌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삼천리 금수강산은 온통 죽음의 강토로 변하곤 했다. 송장이 도처에 널리지만 행여 옮을까 치우기도 겁이 나 아예 정든 산천을 등지고 멀리 타향으로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당시 전염병은 콜레라나 장티푸스, 이질, 紅疫 등이 있었는데 그 중 紅疫은 가히 壓卷(압권)이었다. 누구나 한 번은 걸린다고 하는 이 疫病은 전염성도 강해 일단 발생하면 燎原(요원)의 불길처럼 겉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조선 숙종 33년(1694)의 경우, 초봄에 평안도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1만명 이상이 죽어가더니만 그 해 가을이 되자 전국적으로 만연돼 죽은 자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동네 골목에 어린아이가 드물었고 한 집안이 몰사한 경우도 부지기수’에 이르렀다.

요행히 紅疫에서 살아 남아도 事後에 겪어야 할 고통을 감안한다면 죽은 자나 별반 다름없었다. 부모형제를 떠나보낸 슬픔은 물론 疫病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므로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이 기근의 고통이었다.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벗겨지고 풀뿌리조차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紅疫을 치렀다’는 표현은 비참의 극을 형용하는 말이 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紅疫은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위세를 떨쳐 많은 어린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主犯이었다. 21세기 大明天地에 그 紅疫이 다시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email.hanyang.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