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름도 낯선 외래의 유아교육 철학만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 젊은 부모들의 갈등과 고뇌는 나날이 커져가는 게 현실이다. 공동체의 안전망이 사라지고 핵가족에 육아의 모든 책임이 떠넘겨진 요즘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문제’는 현재 국가의 ‘고려 밖’에 있는 것일까. 새로운 ‘잣대’와 ‘책임’이 마련되길 기대하며 말 많고 탈도 많은 취학전 아동의 육아 문제를 집중 점검한다. 》
지난달 신촌세브란스병원의 소아정신과 진찰실로 승규(3·서울 강남구 신사동)가 엄마 손에 이끌려 왔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진 원형탈모증이었는데 “원인을 모르겠다”며 피부과에서 보냈던 것.
“우리 아이가 정신병자냐”며 투덜거리는 엄마를 의사는 진찰실 밖으로 내보냈다. 10여분 대화 끝에 승규는 “일주일에 3번 영어유치원 다니는 게 무섭다”며 훌쩍거렸고, 이 말을 전해들은 엄마는 “재밌다더니 이제 와 딴 소리냐”며 아이를 윽박질렀다. 의사는 항우울증제 2주일치를 처방했다.
▼국내 적합여부 확인안돼▼
지난해 서울 흑석동 C유치원에 첫 등원한 혜영이(5)는 유치원 문턱에 버텨서서 꿈쩍도 않아 교사들의 애를 태웠다. 혜영이는 한 영어학원에 다니다 유치원으로 옮기던 길이었다. 인근 병원의 의사는 “영어학원의 주입식 교육에 질려 ‘또다른 교육기관’에 거부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진단했다. 혜영이는 사흘만에야 그 문턱을 넘어섰다.
서울 강남 등을 중심으로 열풍처럼 몰아치는 0∼5세 영유아에 대한 조기사교육이 일부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줄 뿐 아니라 ‘안 받느니만 못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조기 사교육이 계층간 위화감을 키운다는 ‘사회적 폐해’가 주로 지적되던 것과 다른 양상. IMF시기에도 급성장해 지난해 2조원대에 이른 영유아 사교육시장의 현장에서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커지는 논란〓지난해 말 E대 이모교수는 일본 국립교육연구소(NIER)의 하시모토 아키히코(橋本昭彦)박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조기교육관련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그가 세계적으로 유독 한 중 일 3국에서만 조기교육 열풍이 부는 상황을 설명하던 중 “그 효과에 회의가 일면서 시들해진 일본산 조기교육 프로그램이 한국에선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것 같다”고 말했던 것.
이 프로그램은 우뇌(右腦)를 집중 자극해 유아의 잠재력을 폭발적으로 키운다는 게 핵심. 이교수는 “한국판 프로그램은 영어교육이 첨가되면서 본모습이 많이 굴절됐지만 일본에서 ‘원조’가 퇴색한다는 건 어쨌든 시사점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출간된 ‘현명한 부모들은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의 저자인 연세대 의대 신의진교수는 “미국 유럽에서 들어온 조기교육 프로그램들은 국내 적합성 여부가 검증되지 않았을 뿐더러 원프로그램과도 상당히 다르다”며 “초등학교의 주입식 교육내용이 ‘외제 그릇’에 담겨 낮은 연령대로 전가되는 경우마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신교수는 얼마전 한 방송사로부터 이런 프로그램 등으로 공부해 유아영어경시대회에서 대상을 탄 광호(3)의 IQ검사를 의뢰받았다. 방송사는 광호를 ‘신동 출현’류의 프로그램에 소개할 참이었다.
▼성장후 부작용 나타날수도▼
신교수는 “How are you?” 등 도식적인 문장을 물었고 광호는 “Fine. Thank you! And you?”식으로 맞장구쳤다. 그런데 응용문장에는 반응이 없었다. 나아가 광호는 시험 상황을 못견디겠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짜증을 냈고, 결국 테스트 장면은 전파를 타지 못했다. 신교수는 “능력 범위를 넘어선 문제에 저항하는 ‘시행 불안’(performance anxiety) 증세였다”며 “지금 배운 게 오히려 커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도 계속되는 열풍〓이런 부작용들에도 불구하고 조기 사교육은 그 교육적 효과에 대한 치밀한 검증 절차를 대부분 생략한 채 확산 일로에 있다.
그 선봉격인 영어유치원은 일반유치원보다 수업료가 2∼3배나 비싸지만 몇달 전부터 ‘대기명단’에 들어야 입학이 가능하다. 서울 강남의 K영어유치원은 “수업료(58만원)와 간식대(3만원) 등 월 60여만원을 내야 하며 보통 네 달씩 기다린다”고 소개했다.
외국어 학습지도 가정방문을 통한 1대1 수업이라는 장점 덕에 꾸준한 신장세다. 이 영유아 학습지시장은 8000억원 규모로 전체 학습지시장(4조원)의 20%선. 최근엔 읽기 쓰기교육 일변도에서 벗어나 각종 카드, 메모리칩 등을 이용한 언어 논리 촉감 수리교육 등으로 확산됐고 온라인 학습지까지 떠오르고 있다.
이같은 열풍의 배경은 뜻밖에도 ‘왕따를 피해야 한다’는 아주 소박한 의식이라는 게 현장 교사와 학부모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안하면 왕따' 확산 부채질▼
지난해 네 살짜리 딸을 영어유치원에 보냈던 이미령씨(34·서울 강남구 논현동)는 남편이 딸을 중도하차시키는 바람에 크게 다퉜다. “원어민 교사들이 자기 수업만 끝나면 퇴근해 휴식시간이 ‘통제 진공상태’가 되는 것을 남편이 목격하고는 아이를 못보내게 했다”면서 “주위 엄마들을 만나면 우리 모녀만 동시에 왕따 당하는 기분”이라고 그는 하소연했다.
▽무풍지대인가?〓영어유치원은 대개 간판만 ‘유치원’일 뿐 성인 또는 중고교생 학원과 행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게 현실.
이들 유치원이 밀집한 서울 강남·서초구를 관할하는 강남교육청은 그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정식 교사가 아닌 고졸 미국인들을 채용하는 일부 기관에 대한 감독은 언감생심이다.
이렇게 파행 상황의 조기 사교육에 ‘건전한 조언자’가 되어야 할 학계도 제몫을 못하기는 마찬가지. D대학의 A교수는 “80년대부터 밀려든 외제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실증적 검토가 최근에야 시작됐다”며 “이 바닥의 돈줄을 유아교육업체들이 쥐고 있는 마당에 누가 그것을 비판할 수 있었겠냐”고 토로했다.
중앙대 유아교육학과의 이원영(李元寧)교수는 “내년부터 시행되는 영재교육진흥법도 조기 사교육의 발상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며 “백년대계의 기초인 유아교육의 왜곡을 막기 위한 작업이 교육인적자원부 차원에서 한시 바삐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병희이승헌기자>bbhe424@donga.com
▼영어유치원 학부모 참관기▼
다음은 진영이(4·가명)의 어머니(32)가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유명 영어유치원이 마련한 학부모 초청수업에 참석한 뒤 조기교육관련 인터넷 사이트 ‘잠수네커가는아이들’에 올린 참관기의 일부다.
외국인 여교사가 ‘스토리 텔링’ 수업에서 제목을 한번 읽은 다음 본문을 죽 읽어주었다. 아이들이 잘 볼 수 있는 큰 자료도 준비하지 않았고 어려운 단어를 미리 들려주는 예비작업도 없었다. 그저 ‘플래쉬 카드’ 등을 내보이며 거기에 무엇이 몇 개 있는지 물었지만 역시 아이들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성격의 두 여자아이(그중 한 아이는 미국에 몇번 다녀옴)가 중간에 질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아이들(모두 남자)은 눈치보고 장난이나 치면서 들러리 선 꼴이었다.
우리 애도 그 중의 하나였다. ‘흥미유발을 통해 주의를 집중시켜 학습효과를 노리기’에는 실패작이었다.
‘호키포키’ 놀이 때는 카세트도 없이 교사가 노래부르며 동작을 시키는 가운데 아이들이 좌우 구분을 못하는 걸 보고도 고쳐주지 않았다. 학부모가 보고 있는데도 이렇게 무성의한데 평소엔 어떨까 생각했다. 원장은 “이 반이 제일 잘하는 반”이라고 했다. 자신이 맡은 아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보이지 않았다.
참관 뒤 많은 엄마들이 ‘문제있다’고 수근거렸고 간담회 때 이런 사항을 지적했다. 유치원측은 “그 외국인 교사는 두번이나 경고받았고 다음에 해고할 수도 있다”며 “‘아메리칸 스타일’이 ‘자유방임적’이라서 그렇다”고 답변했다. 어쨌든 이 교사와 우리 아이가 한동안 함께 수업했다는 사실에 화가 날 정도였다.
<정리〓이승헌기자>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