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 기타]'암호의 세계'

  • 입력 2001년 2월 9일 18시 29분


◇암호의 세계

루돌프 키펜한 지음 김시형 옮김

358쪽 1만2000원 이지북

‘저기입다니자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가장 간단한 암호방식인 ‘자리바꿈 암호’의 한 예다. 왼쪽 끝의 글자부터 좌우로 양끝의 글자를 하나씩 벗겨나가면 쉽게 풀린다.

그렇다면 ‘지캑즌잠고제놘간캑집디라’는 무슨 의미일까? 이것 역시 가장 오래된 암호체계의 하나인 ‘카이사르 암호’를 한글판으로 변형한 것이다. ㅇ→ㅈ, ㅊ→ㅋ처럼 한글 자음을 가나다 순으로 하나씩 옮겼다. 모음은 건드리지 말고 지→이, 캑→책 식으로 하나씩 풀어나가면 뜻을 알 수 있다. (답은 기사 말미에)

비밀과 책략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암호 또한 인간을 따라다니는 동반자가 됐다. 암호가 치밀하게 체계를 갖추면서 이를 해독하려는 반격전술 역시 고도화됐다. 그 공수(攻守)의 수 싸움은 어떤 스포츠 못지 않게 드라마틱하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판도는 겉보기에 화력과 전략으로 판가름났지만 실제론 암호의 공방이 이에 못지 않은 기여를 했다. 실생활에서도 암호가 없다면 독자의 계좌에 있는 모든 현금은 지금 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책은 초보적인 암호체계로부터 점차 고도화되는 암호의 체계를 소상히 설명하는 한편, 암호의 공방이 빚어낸 역사의 일화들을 소개하면서 ‘암호 따라가기’에 지친 머리를 쉬게 할 기회도 제공한다.

철자를 바꾸는 ‘카이사르 암호’는 규칙을 알아내기 쉬워 적에게 판독되기 쉽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구별말’ 법.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임의의 단어를 약속, 이 단어의 철자를 기초로 글자 바꾸기의 질서를 완전히 흩뜨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구별말 법도 의외로 쉽게 풀어나간 ‘선구자’ 들이 있다. 추리작가 에드거 앨런 포가 그 중 하나. 영어 문장에는 ‘e’ ‘t’ 등의 글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고 ‘q’ 등 몇몇 글자는 잘 쓰이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전 알파벳을 재구성할 수 있다.

1차대전 중 전선이 고착되자 독일은 영국 해상 봉쇄를 실시했지만 미국의 참전여부가 문제였다. 독일 외무장관은 멕시코와 일본에 전문을 보내 ‘3국이 동맹을 맺고 일본 멕시코가 미국의 등을 찌른다’는 전략을 제의했다. 전문은 미국에 입수됐고, 미국은 독일이 정신차리지 못하게선제 카운터펀치를 날려 버렸다.

2차대전은 전투기의 성능을 향상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암호에도 일대 약진을 가져왔다. 컴퓨터의 CPU가 수작업을 대신하는 오늘날, 암호를 둘러싼 지적 게임은 더욱 치밀하고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한, 그리고 받는 사람이 있는 한 풀리지 않는 암호란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1991년 구소련 보수파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옐친이 그토록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미국 CIA가 쿠데타 세력의 암호를 해독, 그 행동계획을 옐친에게 미리 제공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책은 말한다.

서두에 나온 두 암호풀이의 정답: ‘저는 기자입니다’ ‘이 책은 암호에 관한 책입니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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