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처음 파리땅을 밟았지요. 파리 국립음악원의 토니 오뱅 교수가 저를 보자마자 ‘윤이상을 아느냐. 2년 동안 내게 배우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가 가니 당신이 오는군’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바짝 들었습니다.
윤선생은 베를린에서 연구를 계속했지만 파리에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베를린이나 파리에 있던 유학생은 거의 그가 주는 참기름을 먹었을 겁니다. 흔히 까다로운 성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뭐든지 나눠주는 편한 분이었어요.
그 뒤 정치적 곡절은 잘 아실 겁니다. 하루는 잘 아는 작곡계 후배가 파리의 제 집을 찾아왔어요. ‘베를린에 가서 윤이상 선생을 만나 작품을 보이려 한다. 일주일 정도 묵으며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고 하더군요. 그순간 현지 공관에서 일하던 남편이 놀라 외쳤습니다. ‘그건 안됩니다’라구요. 저와 후배는 ‘이건 예술에 관한 일인데 왜 말리느냐’고 했죠. 남편은 ‘당신은 정치적인 문제는 이해 못해.’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후배는 결국 베를린에 가지 않았습니다.
요즘 저는 가끔 남편에게 말합니다. ‘내가 왜 힘들여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을까요. 좋아하는 작곡가이지만 문화권이 다른 나와는 코드가 맞지 않았어요. 윤이상 선생을 연구해서 학위를 받았으면 얼마나 연구도 쉬웠고 보람도 생겼을까요.’ 그러면 남편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윤씨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하기 이를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고국의 문화계에 기여할 기회를 거듭 막았던 것은 우리에게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뚜렷한 원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원칙없이 우왕좌왕하면서 노대가의 예민한 가슴에 거듭 상처를 입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를 기리는 통영 현대음악제가 두 번째를 맞는다. 지난해엔 유족이 참석해 만족과 감사를 표시했다. ‘상처입은 용’ 께서는 이제 영혼만이라도 고향 통영 앞바다에 돌아와 쉬시기를.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