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 드브레 교수〓그것은 아마도 미래의 실종일 것입니다. 누구도, 어떤 문화도, 어떤 사상 운동도 현재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말해줄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디를 지향해 가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를 말해주기는 더욱 어려울 겁니다. 모든 영역에서 ‘거대 계획’의 부재는 상당히 근심스러운 일이지요. 20세기는 19세기로부터 내일의 인간은 어제의 인간보다 낫게 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진보의 사상을 물려받았지만 21세기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박〓21세기를 어둡게 전망하고 계시는데 ‘정보화 사회’는 궁극적으로 인간해방과 밝은 미래를 약속하면서 새로운 이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드브레〓‘정보화 사회’는 민중 지향적 이념이 아닙니다. 단지 전문가들을 움직이고 열광시킬 뿐이지요. 내가 보기에 그것은 미국적 테크노크라트 신화일 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빈약한 신화지요.
▽박〓21세기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라고 하셨는데,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과학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확신으로 차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드브레〓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 주목할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같은 정도의 윤리적, 문화적, 심미적 진보로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많이 약화됐다는 점이지요. 20세기에는 그런 기대가 거의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진보에 대한 믿음의 붕괴로부터 비롯된 ‘미래의 실종’이 예술 영역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십니까?
▽드브레〓문화적 풍경 전체가 변하고 있습니다. 각 유파, 각 예술가는 항상 새로 재출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각자가 자기 고유의 아방가르드가 되면서 더 이상의 아방가르드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 버렸지요. 모두에게 공통되는 ‘전선(戰線)’ 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21세기 문턱에서 예술 영역의 새로운 경향이나 혹은 새로운 변화의 전망을 볼 수 있습니까, 있다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드브레〓예언자 노릇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현재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미 시작된 것들을 관찰하면서 말하자면 우선 ‘경계 허물기’ 현상을 지적할 수 있을 겁니다. 무대예술, 비디오 무용, 혹은 사진과 회화의 융합 속에서 혹은 조각, 회화, 공간 연출에 동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설치 미술 등에서 많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미술관들의 장벽을 허물고자하는 의지’를 들 수 있습니다. 미술작품들을 미술관 속에 격리시키지 않고 일상생활과 공공의 장소에 펼쳐놓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 말입니다.
세번째로는 ‘시간에 대한 가치부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는 디지털 신기술 쪽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기술을 통해 우리는 인간―기계간의 대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됐고, 이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박〓앞에서 지적하신 세 가지 새로운 예술 경향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드브레〓긍정적인 면은 이미 이야기했으니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말하지요. 첫째로 장르간 ‘경계 허물기’의 시도는 일관성의 결핍이라는 위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미술관의 장벽 허물기’는 출발 동기는 좋지만 이윤만을 추구했을 때는 아주 위험합니다.
셋째로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가치부여작업’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수용자들과 예술 작품사이에 심미적 관계가 구축되지 못하고 일종의 게임처럼 순전히 유희 관계로 축소되어버릴 위험입니다.▽박〓상호작용적 예술의 장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드브레〓심미적 즐거움이란 역시 드문 감동을 선물처럼 받는 것, 감탄의 경지에 도달해 보는 체험이지요. 기술의 세련도가 그것을 사용해 만든 예술작품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박명진 교수
△1947년 생
△1969년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73년 프랑스 니스대학 불문학 석사
△1978년 프랑스 파리대학 영상커뮤니케이션학 박사
△현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레지 드브레교수
△1940년 생
△1960년 파리 고등사범학교 졸업
△1965년 철학교수 자격획득
△1981―88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제3세계문제 특별자문역
△현재 리옹대학 철학 교수
△저서:‘이미지의 삶과 죽음’, ‘유혹하는 국가’, ‘매개학 선언’, ‘프랑스 지식인, 후속과 종말’ 등.
레지 드브레는 1960년대 체 게바라의 게릴라 부대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돼 3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던 좌파 지식인이다. 그는 권력학, 종교학, 미디아학을 결합한 ‘매개학(medi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을 개척했으며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80년대에는 프랑소아 미테랑의 사회당 정부에서 국제관계 담당 고문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