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 수익에 '극장' 공공성 뒷전>
국내외 오케스트라에 돈을 내고 협연하는 것은 관객 기반이 없는 우리 공연 현실에서는 당장은 어쩔 수 없는 관행이라고 하자. 그러나 이번 일로 예술의 전당이나 나라 전체가 국제적인 망신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은 분명하다. 부끄럽기로는 ‘평론가’란 직업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며 우수한 기획사들도 도매금으로 눈총을 받게 되었다. 우리 문화계의 총체적 부실이요,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보다 근원적인 데 있다. 이를테면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전국의 문예회관이 점차 극장의 존재 이유를 망각해 가고 있는 것이다.
우선 극장의 공공성과 재정 자립도를 맞바꾸고 있는 현상이다. 이번 사건도 알고 보면 수익성에 골몰하는 사이에 중요한 일들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생긴 문제다.
극장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 공연장은 서구의 오래된 극장에 비해 더 연구할 것이 많다. 극장의 철학이 없고 기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어떤가. 고무줄처럼 제멋대로 늘린 좌석표, 합리성이 결여된 고액 티켓의 한탕주의, 외화를 낭비하는 무분별한 초청 공연, 국제적인 한국 스타 음악가의 잦은 돈벌이 내한 공연, 장사가 된다 싶으면 해를 거르지 않고 초청해 식상하게 만드는 풍토 때문에 언제부턴가 국제사회에서 ‘한국 공연시장은 봉’이란 말이 떠돈다. 이 모든 문제를 누가 정리해야 하나. 바로 극장이다. 극장은 우리 문화의 다양한 문제들을 녹이는 ‘용광로’이자 문화정책 소재 발굴의 ‘대륙붕’이다.
그런데도 민간에 관리가 위탁된 이후 세종문화회관은 예술단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예술성을 떨어뜨려 민간위탁 취지를 무색케 하고 있다. 서울시의 문화 마인드가 고작 시설보수를 통한 외화내빈에 만족하는 정도인가. 최근 예술의 전당도 43억원의 흑자를 냈다고 자랑했다. 전 직원이 합심 노력한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선진국에도 없는, 70% 이상이나 되는 재정자립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국립극장은 한 기관의 예술성 평가에서 ‘C’를 받았다. 국민이 낙제점을 약간 웃도는 문화를 향수하고 있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극장이 정책 연구나 예술계 정화에는 손도 못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기금을 타내기 위해 몸살을 앓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관료를 인상한다. 이래서는 정책의 일관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소 지원이 늘었다지만 ‘작품’이 없고 원숙한 관객들은 분위기가 변해버린 극장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어느 연극평론가는 객석에 앉아 있기가 쑥스럽다고 심경을 토로한다. 그 비워진 자리에 ‘가거라 삼팔선’ ‘여로’ ‘비내리는 고모령’같은 악극만 차고 넘친다.
정권 초기에 대통령이 ‘문화대통령’이 되겠다고 자처했던 현 정부의 문화인식이 겨우 문화 경제 논리가 전부란 말인가. 결국 이는 예술가인 약자는 죽고 거대한 권력인 극장만 살아 남는 구조로 고착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의 현장 정서에는 순수문화의 희생과 피지도 못하고 날개를 접어야 하는 안타까운 예술가의 자조와 한탄이 짙게 깔려 있다. 이들의 능력을 신장시키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국민정서를 고급화한다면 이로써 얻어질 가치가 극장을 통해 얻는 단기 순이익과 어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사기 공연'의 교훈 깊이 새겨야>
이제라도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문화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극장의 창의성은 예술인들과의 어울림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예술인과 일면식도 없는 비전문가들이 자리를 차지해 문화를 볼모로 잡고 있다. ‘빈 모차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사칭 사기 사건은 예술도 가짜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문화계 기관 책임자들을 재평가해서라도 정책 기조를 정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예술이 사회를 한층 성숙하게 발전시킨다는 믿음을 정부가 주어야 한다.
탁계석(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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