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 책]한명기-'청일전쟁'

  • 입력 2001년 2월 16일 18시 46분


◇또 짓밟힐 것인가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해군의 전함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의 크기가 7000 톤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100년이 더 지난 오늘날 한국 해군의 주력 구축함이 기껏 4000 톤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함대와 교전을 벌일 당시 그 어마어마한 정원과 진원이 가지고 있던 주포의 포탄이 겨우 세 발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 천년 동안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던 중국이 일본에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비밀’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진순신(陳舜臣)의 대하소설 ‘청일전쟁’(원제 ‘강은 흐르지 않고’·도서출판 우석·1995)은 이처럼 사학도인 필자조차 미처 몰랐던 흥미로운 내용들을 무수히 담고 있다.

대만 출신으로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는 19세기 후반 조선을 놓고 벌어진 중국과 일본 사이의 각축을 수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김옥균, 대원군, 전봉준이 조선의 운명을 부여잡고 고뇌하는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조선을 ‘빼앗고’ ‘지키기’ 위해 이또 히로부미와 이홍장(李鴻章)이 벌이는 노회한 대결도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지녔으되 결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100여 년 전 자국 영토의 한복판을 이민족에게 전쟁터로 내주어야 했던 우리 민족의 서글픈 과거를 담은 한편의 실록이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위기에 처한 당시 우리 모습을 국외자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는 저자의 시각이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은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일본의 실력자인 이또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실력자인 이홍장을 만나 조선의 장래에 대해 담판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김옥균을 만나주지 않았다. 모두 그를 귀찮은 존재로 여겼을 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진순신은 나지막이 말한다. “김옥균은 이또 히로부미나 이홍장을 만나려고 애쓰지 말고 전봉준을 만났어야 했다”. 폐부를 찌르는 지적이다.

2001년 오늘 남북의 지도자는 각기 미국으로, 중국으로,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반도에 미치는 열강의 입김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열강끼리의 짝짓기도 여전하다. 열강의 입김을 넘어 민족 화해와 통일을 이뤄내야 할 오늘에도 김옥균에게 일침을 놓았던 저자의 시각은 여전히 소중하다.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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