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준의 이 만화! 그 애니!]메르헨, 백설공주의 계모에 관한

  • 동아일보
  • 입력 2001년 2월 22일 11시 37분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고들 하지요. '만약 징기스칸이 영국을 점령했더라면…', '만약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를 했다면…'. 이런 식의 '가정'은 그냥 호기심 어린 상상에서 끝나버립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단어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쓰이면 수많은 이야기로 재탄생되곤 합니다. 특히 그동안 알고 있는 역사의 상식을 뒤집는 작품들은 한가지 사실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즐거움을 줍니다. 물론 역사를 왜곡한다, 아이들 교육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식의 꽉 막힌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주인이 세운 바벨탑 이야기나 인류가 우주인이 개발한 생체병기라는 이야기 등 그동안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등장한 기발한 아이디어는 한도 끝도 없지만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백설공주'에 대한 만화입니다.

1998년에 나온 권교정씨의 첫단편집 <적월전기>에 실려있는 단편 '메르헨, 백설공주의 계모에 관한'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화 '백설공주'를 바탕으로 한 만화입니다. 뭐, 월트 디즈니의 <인어공주>처럼 '좋은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의 두리뭉실한 각색이나, 현대인이 갑자기 과거로 가서 맹활약을 펼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추천할 작품이 못되지요.

이 작품은 '백설공주의 계모(여왕)는 사실은 착한 사람이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백설공주'의 계모는 어릴 적에 읽고 보았던 동화의 숱한 인물 중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악역이죠. 특히 우리에게는 콩쥐팥쥐의 계모나 심청전에 나온 뺑덕어멈의 이미지와 연결돼 '계모=악인'이라는 선입견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메르헨, 백설공주의 계모에 관한'에서 '백설공주'의 나쁜 여왕은 젊은 시절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녀는 신분이 낮은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한 백설공주가 왕위를 물려받고 사랑도 이루도록 자신이 악당인 것으로 소문을 냅니다. 계모의 활약 덕분에 백설공주는 먼나라 왕자(물론 가짜 신분)와 결혼해 금의환향한다는 줄거리입니다.
황당하다면 황당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단편이라는 짧은 공간 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구성과 소재로 신빙성 높은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은 역시 작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스토리가 맘에 드신 분이라면 같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피리 부는 사나이'도 꼭 보시길 바랍니다. 시대 배경이 현대여서 어떻게 보면 '메르헨,…'에 비해 '현실감'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한가지 사실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엿보게 해줍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계층의 관객을 상대하려다 보니, 만화와 달리 고전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단순히 작품의 소재나 사건의 모티브 정도로만 사용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좋아하는 작품의 토대가 된 작품을 되돌아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 팬이라면 <해저 2만리>를, <하늘의 성 라퓨타>를 좋아한다면 <걸리버 여행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일 겁니다.

이번에 소개한 만화와는 정반대의 느낌이긴 하지만, 현대에 어울리게 동화를 차용한 <인랑(人狼)>도 괜찮은 텍스트로 볼 수 있겠지요. 항상 웃는 모습인 그림형제의 동화 <빨간 모자>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김세준 <만화평론가> joon@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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