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혼슈(本州)에서도 서쪽의 주코쿠(中國) 지방은 남쪽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와 동해 남쪽(일본해) 사이에 등뼈처럼 뻗어 있는 산악 지역이다. 너무나도 대조적인 두 바다에 면해 있어 일본해와 닿아 있는 북쪽 지역은 흔히 상인(山陰), 세토나이카이와 닿아 있는 남쪽 지역은 상요(山陽)지방으로 불린다.
주코쿠 지역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흔히 찾는 쿠슈(九州)나 긴키(近幾) 지방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대중적인 관광지는 아니다. 그러나 한-일간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야 할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일본해에 면해 있는 상인 지방의 도시 하기(萩)는 역사가 빛나는 도시로 도자기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기의 일본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학습장이 된다. 후쿠오카(福岡)나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고속버스나 철도로 대략 2,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하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하기도자기(하기야키·萩燒)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생가.
‘하기야키’는 일본 다기(茶器)의 세계에서 ‘一樂, 二萩, 三唐津(가라쓰·쿠슈 지방 도자기 산지의 하나)’라 칭해질 정도로 이름난 도자기다. 담백하고 중후한 감각이 넘치고 사용할수록 맛이 깊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하기야키’의 기원은 옛 헤이안(平安)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명성을 얻은 것은 전국시대 주코쿠 지방의 패자(覇者)였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그 유명한 미노(美濃)의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서군의 맹주로 출전했으나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함)가 하기에 큰 성을 쌓았을 때부터다. 지금도 하기 시내에는 이 때의 성터와 무사들의 집이 남아 있다. 모리 테루모토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이작광(李勺光) 이경(李敬)이라는 도공 명인 형제를 끌고와 도자기 굽는 가마를 열게 하고 인근의 옛 가마들도 부흥시켰다. 에도(江戶)시대에는 바쿠후(幕府)의 어용가마로서 보호되기도 했고, 그 명맥이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번 취재 여행에서는 이경(李敬)의 12대 손으로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카 고라이자에몬(坂高麗左衛門)을 만날 수 있었다. 사카(坂)씨는 모리 성주가 내린 성. 이름에 ‘고려’자가 분명하게 들어가 있다. 특히 사카씨는 ‘하기야키’의 전통을 잇는 명인으로서 지금도 한국식의 옛 가마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가마는 일본 전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한국식 가마로 역사적 가치가 대단하다. 특히 올해는 이씨 형제가 이곳에 가마를 연 지 400주년이 되는 해라는 것이 사카씨의 증언. 이 때문에 사카씨는 도쿄 등지에서 대대적인 작품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 도공 이경 12대손 사카씨 한국식 가마 사용 … 이토오 히로부미 생가도◇
자신들의 원 뿌리가 대략 경남 진주 일원일 것으로 추정하는 사카씨는 “형인 이작광의 후예들은 그동안 손이 끊어졌다”면서 자신도 아이가 없어 여동생의 아들이나 문하생에게 가마를 물려줄 예정이라고 한다. 사카씨는 “고려자기 초기 모습인 잔 받침(고대)을 높게 한 것이 유지되는 등 고려자기의 모양을 그대로 지키고자 노력한 것이 하기야키로서 일본인들이 차를 즐길 때 가장 각광받는 다기”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조선의 도공이 일본에서 으뜸가는 다기를 일군 지방에서 메이지 초기 정한론(征韓論)의 시발이라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오인(吉田松陰·1830∼1859)이 사설학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을 연 것은 역사의 무서움을 일깨워 주는 대목. 하기에서 태어난 요시다는 10세 때 이미 한(藩)에서 운영하는 학교인 명륜관에서 강의를 할 정도로 대단히 조숙했다고 하며, 페리호의 내항 이후 양이(洋夷)사상을 버리고 외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한다. 페리호를 타고 밀항하려 했으나 붙잡혀 감옥에 들어갔고, 감옥에서 많은 공부를 한 끝에 소카손주쿠를 열어 많은 인재를 모아 교육을 실시했다. 이 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이 바로 이토오 히로부미,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유신 직후 국방장관 역임),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普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 바쿠후 말기와 메이지유신 초기에 일대 활약을 펼친 사람들이다.
이처럼 하기가 있는 야마구치켄(山口縣·옛 이름은 쵸오슈(長州))과 사츠마(현재의 가고시마)는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신분상으로 하급무사 출신이라는 점과 연령적으로는 20, 30대 초반의 젊은 층이 주축세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존의 봉건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사고와 시대를 내다보는 선견력을 바탕으로 사명감과 애국심을 결집해 유신의 리더층을 형성했다. 여기에 시대의 변화를 예견한 미츠이(三井) 등 일부 대상인들이 가세해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요시다가 1854년 11월에 쓴 유슈로쿠(幽囚錄)는 “지금 시급히 군비를 정비하여 함선과 대포가 갖추어지면 바로 북해도를 개간해 제후를 파견하고 기회를 틈타 캄차카 반도를 빼앗고, 류우큐우(琉球·현재의 오키나와)를 깨우쳐…, 조선을 공략하여 인질과 조공을 바치게 하여 옛날과 같은 성시(盛時)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정한론과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사상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것. 요시다는 1859년 안세이(安政) 대옥(大獄)사건에 연루돼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처형되었다.
따라서 하기에는 지금도 이토오 히로부미가 살았던 집은 물론, 공부를 했던 쇼카손주쿠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근세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하기(萩)를 가보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또 다른 산 경험이라고 할 만하다.
하기에서는 이곳에서 하나뿐인 고온 천연온천을 갖춘 하기혼진(萩本陣·0838-22-5252) 호텔에서의 숙박을 권하고 싶다. 이 호텔은 호텔 뒤 산 중턱에 노천온천을 만들어 호텔에서 모노레일을 통해 올라가도록 시설을 갖췄다. 하기 시가지와 바다를 내려다보며 온천을 즐기는 것이 이 곳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다.
<하기(추)=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
<사진·주간동아 김형우 기자>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