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본인 학자가 3·1운동 당시에 구속됐던 한국 민초들의 재판기록을 통해 3·1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여생을 바치고 있다. 일본 국제기독교대 사사가와 노리가쓰(笹川紀勝·60·헌법학)교수가 주인공. 3·1운동 82주년을 앞두고 28일 그를 만났다.
사사가와 교수는 80년대 말 일본의 한 연구회에서 우연히 한글로 번역된 3·1운동 재판기록을 보는 순간 “법학자의 가슴이 뛰었다”는 말로 3·1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한국 어딘가에 일본어로 된 재판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몇 차례 한국을 찾아가 학자들과 접촉한 결과 정부기록보존소에 3·1운동 재판기록을 담은 마이크로필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91년 8월 처음으로 마이크로필름을 대하게 된 그는 그 뒤에도 수십차례 한국을 오가며 방대한 관련 기록을 찾아냈다.
사사가와 교수가 꼼꼼하게 만든 명단에는 1600여명이 올라있다. 명단 중 일부는 국가보훈처가 만든 ‘독립유공자 공훈록’이나 다른 학자의 연구에도 나오지만 상당수는 그가 새로 찾아낸 사람들이다.
사사가와 교수는 “기록을 정리해보니 대부분의 구속자가 2년여의 짧은 기간에 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과 고등법원(현재의 대법원)까지 올라가 무죄를 다툰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났다”며 “일부 판결은 3·1운동이 비폭력에 의한 일반 대중의 독립운동이자 시위행위임을 인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찬반이 있겠지만 법률가의 눈으로, 판결문을 통해 식민통치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나를 밝히는 것은 일본에 매우 중요한 반성자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식민지의 실태를 모르니까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에도 도움을 줬다는 등의 왜곡발언이 나온다는 것.
그는 “일본에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이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 스스로가 식민지에서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일본통치하의 재판에 관한 일한공동연구회’가 만들어져 한일 양국 학자 3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첫 모임은 지난해 12월 서울 국민대에서 열렸고 2차 모임은 5월 도쿄에서 열린다. 1차 보고서를 내는 8월까지의 경비는 도요다재단이 지원한다.
사사가와 교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주요판결 원문을 영인해 ‘3·1운동 판결정선’이라는 4권의 자료집도 발간했다.
그는 북한에도 3·1운동 재판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라며 “3·1운동은 남북한의 공동유산이기 때문에 남북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연구테마”라고 강조했다.
3·1운동 연구 때문에 본업인 ‘천황제’나 ‘신앙의 자유’ 연구는 폐업상태. 그러나 3·1운동연구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어서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만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고민이 있기는 하다. 앞으로 얼마가 더 들지 모르는 경비를 부담할 마땅한 지원자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는 “뜻있는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자가 나타났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말했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