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가서 사는 거야.”
“그럼 나 학원 안 다녀도 돼? 실컷 놀 수 있는 거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에서 열린 제1회 해외 이주 이민 박람회 마지막날인 4일. 초등학생 남매를 데리고 온 주부 허미애(許美愛·40·서울 성동구 풍납동)씨는 정보수집을 하는 짬짬이 아이들의 질문에 답해 주고 있었다.
“매달 70만원이 드는데 중학생이 되면 한 명에 50만∼60만원씩 과외비로 쓰면 회사원 월급으로 어떻게 사나요. 남편 친구들도 벌써 여러 명 이민갔어요. 40대가 되면 누구나 이민을 생각하지요.”
이민박람회장 바로 옆에서 제12회 해외 유학박람회도 열려 3, 4일 이틀간 모두 4만5000여명이 두 박람회장을 찾았다. 지난해 가을 유학박람회 때의 3만여명에 비해 무려 75% 가량 늘어난 수치다.
▽교육이민〓‘아이 잡는’ 치열한 교육 경쟁과 ‘허리가 휠 정도’의 과외비가 학생과 학부모들을 나라 밖으로 내밀고 있다. 부모와 동행하는 유학이 아닌 불법 조기유학생 수는 99년 한 해에 1650명이었지만 지난해 3, 4월 두 달 동안 이미 99년의 약 43%인 705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해외 이민자는 99년 1만2655명에서 지난해 1만5307명으로 약 21% 늘었다.
‘교육 이민’의 폭증세를 반영하듯 이민박람회장에는 ‘교육 이민 전문’ 간판을 내건 이민 알선업체가 많았다. 한국국외이주알선법인협회의 관계자는 “이민 상담자 10명 가운데 7, 8명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민을 생각한다고 말한다”면서 “상담자가 놀랄 지경”이라고 말했다.
‘교육 이민’을 희망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
미국으로의 이민을 준비중인 주부 박모씨(42·서울 노원구 중계동)는 “공무원인 남편 월급으로는 초등학교 3학년, 5학년생인 형제의 과외비를 댈 수 없다”면서 “차라리 이민가는 게 경제적으로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관성 없는 교육 정책에 따른 혼선과 살인적인 입시 경쟁, 학교폭력 왕따 교실붕괴 등으로 황폐해지는 학교,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교육 등이 ‘이민 행렬’을 늘리고 있다.
자영업을 하는 이영덕씨(45·서울 강남구 대치동)는 “낯선 땅이 두렵긴 하지만 ‘애들 잡는’ 이곳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캐나다에서 초등학교 2, 3학년을 다닌 이채영양(11·경기 안양시 동안구 달안동)도 “외국서 살다왔다고 따돌리고 선생님도 무섭다”면서 “이민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지난해 11월 학부모와 교육 전문가 11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8.3%가 입시 위주의 교육과 과다한 사교육비로 학교 교육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고 대답했으며 49.5%가 일관성 없는 정책이 교육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대답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 이 같은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은 45.2%였다.
▽정치 경제에 실망〓정치 경제적인 상황도 이민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김모씨는 “국내 사양산업인 의류, 봉제업이 각광받는 나라로 떠날 생각”이라면서 “국내에서는 업종을 불문하고 중소기업을 운영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정모씨(47·경기 수원시 권선구)는 “이 사회에 비전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업의 비전을 제시하는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회의를 느꼈다”고 박람회장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박영민씨(42·서울 노원구 중계동)는 “외환위기 때도 지도층은 서로 책임을 미루기만 했으며 정치판을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아 20, 30년 뒤를 보고 이민가자고 남편을 설득하고 있다”면서 “솔직히 미국 유학생이 요즘 국내에서 제일 잘나가고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미국인 케빈 피터스(35)는 “시험만을 위해 공부하는 한국의 교육은 희화적이다. 한국의 학생들에게는 자유가 없다. 내가 한국인이라도 이민가겠다”고 말했다.
<이진영기자>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