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殺身成仁(살신성인)

  • 입력 2001년 3월 6일 18시 53분


儒家(유가)의 중심사상이 仁이며 孔子가 가장 중시했던 德目(덕목) 또한 바로 그 仁이었음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仁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孔子는 忠과 恕라고 해석했다. 쉽게 말해 타인에 대한 慈悲(자비)나 人間愛(인간애), 同情心(동정심)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仁은 君子가 먼저 익혀야할 德目이기도 했다.

“군자가 仁을 버리고 어찌 이름을 이룰 수 있으랴?”(君子去仁, 惡乎成名?)

곧 仁은 몸소 행동으로 實踐(실천)해야 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공자의 가르침 자체가 實踐道德이 아니었던가.

물론 仁이 최고의 덕목인 만큼 仁 자체에는 大小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行하는데 있어 輕重(경중)과 貴賤(귀천)의 구별 또한 있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심지어 여기에는 生死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것이 된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道義心이 강하고 의지가 깊은 사람(志士)이나, 仁德을 갖춘 사람(仁人)이라면 목숨과 仁이 兩立할 수 없을 때 生命을 아끼느라 仁을 해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一身을 희생(殺身)하면서까지 仁을 實踐하지 않을까(成仁)? 그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志士와 仁人은 살기 위해 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몸을 죽여 仁을 행할 뿐이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孟子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생선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원하는 것이지만 둘을 함께 추구할 수 없다면 생선보다는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生도 원하는 것이고 義도 원하는 것인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生을 버리고 義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유명한 ‘捨生取義’(사생취의)다. 仁義가 같은 덕목일진대 공자나 맹자는 仁義를 목숨보다도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곧 殺身成仁이라면 正義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草芥(초개)같이 버리는 것을 뜻한다. 비늘만한 자비에도 인색한 게 요즘 세태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이 사회에는 그래도 그런 분들이 적지 않아 어둠과 각박한 세상에 한 줄기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근래 연이어 殺身成仁의 소식이다. 일본에 유학갔던 한 한국인 학생에 이어 소방관 여섯분의 순직이 그것이다.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숭고하다 하겠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