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입속의 검은 잎' 기형도 12주기

  • 입력 2001년 3월 6일 18시 54분


◇다시 돌아본 '영원한 청년시인'

4일 오후 경기 안성 가톨릭 공원묘지. 나이 서른에 유명을 달리한 고(故) 기형도 시인(1960∼1989)의 추모 모임이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를 사랑했던 지인(知人)들이 매년 3월 첫째 일요일에 모인 것이 벌써 열 번째.

채호기 문학과지성사 대표, 소설가 성석제, 시인 조병준, 유가족 등 10여명이 눈발이 흩날리는 빙판길을 헤치고 고인 앞에 섰다. 초콜릿, 바나나, 콜라 등 생전에 즐겼던 음식을 한 상 차려받은 영정속 시인의 얼굴은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앞에서 어느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누님 애도씨는 무덤 곁에서 고인과 사분사분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이 어린 조카는 고인의 등에 올라타서 까르르 웃었다. 평소 술을 못 마셨던 고인 대신 소주 한 병을 비운 성석제와 조병준은 불콰한 얼굴로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죽음이란/가면(假面)을 벗은 삶인 것./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우리는/서로 닮은 아픔을 향하여/불을 지피었다.’(기형도의 시 ‘겨울·눈·나무·숲’ 중)

기형도는 떠났으나 시인이 남긴 상실의 아픔은 오히려 남은 이들의 정을 더욱 도탑게 만들어 주고 있으니 고인의 소집에 자발적으로 응한 이들은 서로가 안부를 물으며 한파 속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애도씨가 “15년 전 동생에게 선물받아 지금까지 고이 모셔둔 양주 한 병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자, 성석제는 “양주는 오래 두면 변질되니 빨리 확인해보자”며 개봉을 종용했다. 애도씨가 “노벨상 받아오면 한 잔은 줄 수 있다”고 맞받자, 성씨는 “노벨 평화상도 괜찮으냐?”고 물어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기형도는 ‘내 청결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나는 부재(不在)할 것이다’라고 시로 읊었지만 시인의 작품은 여전히 독자의 가슴에 존재하고 있다.

채호기 대표는 “시인의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과 사후에 묶여져 나온 ‘기형도 전집’은 시가 괄시받는 요즘에도 1주일에 200부씩 팔려나간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모두 30만명 가까운 독자가 찾는 인기를 누리며 황동규, 황지우 등 쟁쟁한 ‘문지시인선’ 선배들을 앞섰다.

성석제는 “윤동주나 김소월이 보여주지 못했던 20대의 천재적 감수성은 어느 시대건 젊은이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화목했던 추억의 시간도 잠시, 내년에 다시 고인을 보러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모두들 서둘러 서울로, 부산으로 떠났다. 눈발이 그친 황혼에 남아 시인은 이들을 배웅하며 이런 노래를 불렀으리라.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살아 있음도 살아 잇찌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중).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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