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만 된다면…▼
대학원생 최모씨(26)는 얼마 전 서울의 한 대형서점 ‘영어학습서’ 코너에서 신간 영어참고서를 뒤지다가 흠칫 놀랐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는 부제가 달린 영어회화책을 발견했기 때문. ‘성인만을 위한 화끈한 영어회화’라는 제목의 이 책은 속옷을 입은 여체의 사진을 배경으로 깔고 각종 체위 묘사, 스트립쇼 관람, 성인비디오 구입 요령 등에 관한 상황을 설정하고 ‘극히 사실적인’ 성적 묘사의 영어 표현들로 채워져 있었다.
“Who did you have sex with?”와 “Who did you have dinner with?”를 나란히 넣고 ‘이렇게 외우면 절대로 안 잊어버린다’라는 세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었다. ‘콘돔 있니?(Do you have a condom with you?)’로 전치사 ‘with’의 감을 익히면 ‘우산 있니?(Do you have an umbrella with you)’도 사용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중고생들도 자주 접하는 영어회화 참고서들 중 최근 지나친 구어체 비속어와 성적 묘사가 들어간 표현을 내용으로 다룬 책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글 싣는 순서▼ |
<상> 판치는 '저급 영어' |
출판사들이 ‘구어’라는 틈새시장을 노리고 음담이나 비속어를 주제로 한 영어책들을 잇따라 내놓아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적지않은 수요층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 대학생들의 마약복용, 개방적인 성문화 등을 담은 ‘미국 20대가 즐겨 쓰는 BOX영어’는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최근까지 45만부 가까운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대부분 집필진이 20∼30대 미국 현지 유학생들인 이 부류의 책들은 제목부터 자극적인 것들이 많다. ‘영어로 읽는 SEX 생각’에서는 ‘attend on(시중들다)’이 ‘관계를 맺었다’와 혼용된다며 “I attended on her last night”을 예문으로 다뤘다. “She grant the last favor to him(그녀는 결국 그에게 몸을 허락했다)”으로 ‘grant’의 뜻을 외우는 방식이다. ‘로맨스 소설로 배우는 영어회화’에는 소제목조차 ‘여비서 길들이기’ ‘부드럽고 격렬한 키스’ ‘유능한 변호사와 플레이보이’ 등으로 포장돼 있다. ‘LA술이랑’은 “I beated his brain’s out(그애를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처럼 술을 마신 상태에서 행할 수 있는 각종 미국 욕설과 인종차별 발언이 가득 메우고 있으며 ‘동사구도 모르면서 어떻게 영어를 해’ 같은 정상적(?)인 제목의 책에서도 ‘make out(애무하다)’, ‘turn on(하고 싶다)’ 등을 중요숙어로 분류해 놓고 있다.
▼'본류영어'를 배워야▼
전문가들은 이같은 서적들이 ‘하우 아 유, 파인 땡큐’식의 도식적인 회화구문을 다루지 않은데다 자극적인 주제를 양념으로 다루고 있어 가독성을 높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슬랭도 영어다’의 저자 백선엽(白善燁)씨는 “흑인문화에 기초한 랩이나 힙합음악이 젊은 세대 가요의 주류를 이루는 등의 문화적 환경의 변화가 자연스레 슬랭이나 직설적 성표현을 다룬 영어에 대한 수요를 형성한 듯 보인다”고 분석했다.
뿌리깊은 ‘범국민적 영어 콤플렉스’가 ‘영어면 뭐든 배우고 보자’로 이어진 지금의 분위기는 자칫 어린 학생들에게 근본적인 언어생활 환경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높다. 가뜩이나 인터넷 채팅 등에서 한국어의 오염이 심각해지고 있는 마당에 접촉빈도가 높은 영어마저 입과 귀에 수월하게 익숙해진다는 이유로 ‘비주류 영어’를 배우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다.
영어강사 이보영(李寶寧)씨는 “말초신경을 자극해 영어 학습동기를 자극하는 것은 포르노를 보기 위해 인터넷을 배우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며 “슬랭의 경우 미국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가 심해 본질적인 영어실력 상승과는 연관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대 영문과 김성곤(金聖坤)교수는 “비영어권 나라에서의 ‘영어 경쟁력’은 비즈니스와 사교능력에 충실한 ‘본류 영어(Mainstream English)’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습득하느냐에 달렸다”며 “직설적 감정표현에 치중한 이른바 ‘미군부대식’ ‘교포1세대식’ 언어습관보다는 논리에 맞게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칠 수 있는 회화 패턴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