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코리안 English]말한마디 못하는 토플만점

  • 입력 2001년 3월 8일 18시 45분


▼한국학생은 영어음치▼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체에 근무하다 미국 아이비 리그(Ivy League·하버드 예일대 등 동부지역 명문대들)에서 학위과정 연수를 받고 있는 김모씨(35). 최근 생애에서 ‘첫 좌절감’을 맛보고 있다.

회사에서 900점대의 ‘우수한’ 토익(TOEIC)성적을 자랑하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지난 가을 미국으로 떠나갈 때만 해도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3년 가량 매일 새벽 영어학원을 다니며 꾸준히 공부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단한 인사말도 쉽지 않았다. 책 읽기는 물론 수업내용도 녹음기를 동원해 거듭 들었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질문과 발표는 엄두를 못낼 정도였다. 며칠 밤을 끙끙대며 한 첫 과제물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으니 다시 써보세요’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법과 독해에 주안점을 두고 시험성적을 중시해온 ‘시험용 영어교육’의 피해자는 김씨뿐이 아니다. 지금도 영어학원은 새벽부터 직장인과 학생들로 붐빈다. 곳곳에서 영어 테이프를 듣는 학생을 볼 수 있다. ‘영어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배우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학부모들이 늘면서 조기유학 붐이 일 정도다.

미국 대학교수들이 한국 유학생들에 대해 풀기 힘든 의문점 3가지. ‘토플(TOEFL) 점수는 만점에 가까울 정도로 높은데 영어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다’ ‘수업 시간에는 조용한데 시험 점수는 높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데 여전히 영어를 잘 못한다’ 등이다.

‘점수는 좋은데 실력은 형편없는’ 한국 학생들을 꼬집는 뼈아픈 농담이다. 이는 실제 토플을 가르치는 서울의 일부 영어학원들이 ‘찍기 비법’ 등의 구호로 학생들을 유인하며 점수 올리기에만 급급한 현실과도 연관성이 높다.

강남지역 모 학원에선 강사가 ‘찍기도 기술이다. 문제를 안 보고 답안만 보고도 답을 맞힐 수 있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할 정도다. 이 같은 ‘찍기 열풍’은 지난해 말 토플시험이 종이시험(PBT)에서 컴퓨터시험(CBT)으로 바뀐 뒤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일부 학원에서는 토플 시험을 주관하는 평가기관인 ETS가 문제은행식 출제방식으로 같은 달 수험자들에게 중복된 문제를 사용하는 점을 악용, 경험담을 모아서 게시하거나 따로 ‘최신 문제집’을 만들어 강의하고 있다. 시험에 대비한 ‘찍기용 영어’가 실전에서 통할 리 없다.

▼외국에선 어떻게▼

외환위기가 아시아를 강타했던 90년대말 일본에서는 ‘영어음치 망국론’이 터져나왔고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낸 데라사와 요시오 참의원의원이 펴낸 ‘영어음치가 나라를 망친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일본의 금융불안은 정치인 관료가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고 국제회의만 나가면 몸을 사리는 당국자들 때문에 피해가 크다”는 핵심적인 지적은 한국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게 현실이다.

영어교육의 문제점은 아시아 각국의 토플점수 비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필리핀 인도 스리랑카 등 영어권 국가의 식민지였던 나라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중국과 한국은 상위권에 포함된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한국이 505점이었을 때 470점 수준이었던 중국은 90년대 중후반 평균 10점 이상 차이로 한국을 추월하며 앞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차이는 한국어의 어순이 영어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 등지에서는 문법과 독해에 치우치기보다 듣기 말하기 쓰기 등을 강조하는 실용적인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고려대 영어교육과 김덕기(金德起)교수는 “영어를 제대로 듣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기와 문법에 치우쳐 영어를 가르쳐온 게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서 “영어능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이 영어를 지도하는 게 중요하며 학생 학부모들은 영어에 대한 압박감과 조급증을 버리고 영어와 친숙해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익훈어학원의 이익훈원장은 “미국 대학들이 ETS에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항의할 정도로 한국 학생들은 문법 독해만 강하고 듣기 쓰기가 약하다”면서 “눈앞의 점수에 집착하지 않고 영어로 일기를 쓰고 듣기훈련도 하는 등 보다 실용적인 영어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달기자>d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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