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아이보다 좀더 잘 키우려고 한 게 오히려 애를 잡을 줄 몰랐어요.”
주부 박모씨(31·서울 강남구 삼성동)가 소아정신과 진료실에서 흐느꼈다. 세 살배기 큰 아들이 뇌 발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 것. 아들이 ‘엄마’ ‘아빠’를 발음하지 못하고 엄마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을 때만 해도 ‘설마’ 했었다. 의사는 ‘과도하게 영어 학습을 시킨 것이 화근”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영어교육은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는 말에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영어 테이프로 태교를 했다. 애가 태어난 이후에는 영어 테이프를 틀어놓고 젖을 먹였고 생후 6개월부터는 영어 비디오 테이프를 하루에 2시간씩 보여줬다. 또 생후 24개월부터 외국인이 가르친다는 A영어유치원에서 한달에 60만원씩 주고 영어를 가르친 결과였다.
▽정상적인 성장 방해〓과도한 조기 영어교육이 영어 조기 습득은커녕 언어지체나 주의력 산만 등을 초래해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신의진(申宜眞)교수는 “지난해부터 이전에는 없었던 언어소통 장애 아이들이 한 달에 두세명씩 병원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또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원형탈모증에 걸려 피부과를 찾았다가 정신과로 오는 어린 환자들도 점점 늘고 있다.
▽방식도 문제〓2세 미만의 아기에게는 특히 영어 비디오를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 젖먹이의 뇌는 엄마의 사랑이 담긴 말을 배운 뒤 이 말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회로를 만드는데 이 회로가 제때에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뇌회로망 전체가 뒤죽박죽이 돼 평생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살 위험이 크다.
또 문화와 정서가 다른 외국인 강사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은 아기의 뇌를 수동적으로 만들어 오히려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고려대 안산병원 소아과 은백린(殷伯麟)교수는 “주입식 교육이나 영어 비디오에 많이 노출돼 아기가 말이 늦거나 혼자서 노는 것을 좋아하면 무조건 끊어야 한다”면서 “대신 자주 안아주고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 함께 노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언제 어떻게 배워야▼
▽영어 교습 연령〓10년 전의 초등학교 3학년에서 요즘은 5세에 시작해도 늦는다는 얘기를 듣는다. 영어유치원에서 경쟁적으로 24개월 이하 유아반을 만들고 있으며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도 3개월부터 영어를 배우는 강좌가 경쟁적으로 생기고 있다.
A유치원 정모원장(42·여)은 “8년 전 처음 영어 유치원을 열었을 때만 해도 초등학교 3학년생 이하가 드물었는데 최근에는 0∼12개월 자녀를 데리고 와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엄마들이 많다”고 말했다. 영어 등 제2외국어 학습의 적기는 초등학교 2, 3학년.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모국어를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을 때 효과적이기 때문.
▽무자격 강사 및 프로그램〓서울 강남지역과 경기 분당 등 신도시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영어유치원은 이름은 유치원이지만 ‘유아교육진흥법’에 따라 설립된 정식 유치원이 아니다. 일정 자격의 유아교육 전공자를 채용해야 하는 일반 유치원과 달리 이들은 대부분 외국 거주 경험을 위주로 선발된 미전공자를 교사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 잘못 다루면 상처받기 쉬워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영유아 교육이 미자격자에 의해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유치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교사 중 영어를 전공한 사람은 66.4%이며 유아교육 전공자는 5.6%에 불과하다.
검증되지 않은 영어 프로그램과 교재도 문제다. 대부분 미국 영국 등에서 들여온 프로그램이나 교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적합한지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
▽대책〓숭의여대 유아교육과 김진영(金鎭榮·여)교수는 “유아기에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고 영원히 영어학습의 기회를 잃는 것이 아니며 많은 정보를 소화해낼 수 있는 청소년기에 시작하는 것도 많은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의대 강북삼성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노경선(盧景宣)교수는 “영어에 집착하지 말고 놀고 노래나 놀이를 통해 재미있게 영어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두 가지 언어를 어렸을 때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스위스 캐나다처럼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나라의 영어 조기교육에는 자연스러운 언어환경이 없다. 이 같은 환경을 고려한다면 외국인들을 자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없애 문화적인 정서를 느끼는 것으로도 어릴 때는 족하다.
<이호갑기자>gd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