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허니문 여행지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지난 98년 봄. 이후 시설 좋고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필리핀의 리조트들은 한국 허니무너(Honeymooner)들이 손꼽는 휴양지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최근 관광객들로 붐비는 번잡함을 피해 호젓하고 아늑한 허니문 투어를 꿈꾸는 예비부부들이 부쩍 늘었다. 필리핀에서 이런 ‘나만의 여행’을 만끽할 수 있는 리조트가 바로 다칵(Dakak)이다. 관광안내 책자에도 나오지 않는 곳, 엘리도`-`이사벨`-`풀크라`-`샹그릴라 등 세부-막탄섬 일대 유명 리조트들을 줄줄 꿰는 베테랑에게조차 낯선 미개척지다.
다칵 리조트는 루손섬(수도 마닐라가 있다)에 이어 필리핀에서 두번째로 큰 민다나오섬 북서부의 다피탄(Dapitan)시에 자리하고 있다. 다피탄시는 필리핀의 독립영웅 호세 리잘 박사(1페소 주화의 모델이기도 하다)가 스페인의 탄압을 피한 은신처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
우선 이 다피탄시로 들어가려면 인근 디플로그(Diplog) 공항을 거쳐야 한다. 마닐라에서 필리핀 국내선을 타고 1시간15분쯤 날아가면 시골 간이역 분위기의 디플로그 공항에 닿는다. 공기 탁하고 번잡한 마닐라와는 사뭇 다른 오지 풍경이 신선하다. 리조트에서 마중나온 승합차로 작은 야산을 넘어 40분쯤 달리면 이내 핑크빛 낙조가 웅장한 다칵 리조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칵은 1988년 필리핀 상원의원 로메오가 개발한 리조트. 산으로 빙 둘러쳐진 가운데 자리한, 호수처럼 고요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여주는 비경이 압권이다. 이 리조트의 컨셉트는 ‘자연’과 ‘휴식.’ 전혀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강렬한 원색의 세계를 뽐낸다. 필리핀의 상당수 유명 리조트들이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리조트 로비에서 300보 가량 걸으면 닿는 전망대에서 리조트 전체를 한눈에 굽어보면 이같은 자연친화적 면모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객실이 위치한 정글숲에서는 원숭이나 이구아나와도 심심찮게 조우할 수 있다.
민다나오섬이 적도 부근에 자리한 까닭에 다칵은 태풍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계절 여름뿐인 필리핀에서 가장 시원한 곳으로 이름 높다. 때문에 필리핀 상류층의 발길이 줄곧 이어지고 있지만, 95년 미스 유니버스대회 당시 전세계 미녀들이 수영복 촬영을 했을 만큼 오히려 유럽인들에게 더 인기를 끄는 곳이 또한 다칵이다. 전체 리조트 이용객의 90% 이상이 외부의 ‘간섭’을 싫어하는 유럽인들이다. 이들은 주로 3∼5월 성수기에 찾아와 보름 내지 한달 가량 휴양을 즐기고 떠난다. 그러나 이 시기엔 현지의 낮 최고기온이 40도까지 치솟는 경우가 잦으므로 호젓함을 즐기고 싶다면 차라리 비수기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칵 리조트의 가장 돋보이는 매력은 무엇보다 수온과 수심에 따라 코발트빛이나 녹색, 옥색 등 각기 다른 빛을 띠는 맑은 바다와 길이 750m에 달하는 백사장. 마리바고블루워터(막탄섬) 등 필리핀의 대다수 리조트가 인공으로 조성한 개인 비치를 끼고 있는 것과 달리, 다칵에서는 눈부실 정도로 흰 산호 가루가 지천으로 깔린 자연 그대로의 백사장을 밟을 수 있다.
◇잔잔한 바다, 산호가루 백사장…호젓하게 쉴 수 있는 최적의 공간◇
살랑살랑 불어오는 남국의 미풍에 몸을 맡긴 채 해먹에 누워 사색에 잠기거나,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별들을 바라보며 해안을 향해 탁 트인 개방형 레스토랑 ‘포트 퀘ㄴ트’(Port Quent)에서 디너파티를 갖는 운치도 그만이다. 늦은 밤 해변에서는 밤새 게들이 백사장 위를 쏜살처럼 빠르게 이동하는 흔치않은 광경도 볼 수 있다. 만찬 후의 필리핀 민속공연 관람도 이곳의 또다른 재미. 스페인과 폴리네시안 전통이 혼재된 듯한 전통 춤들은 스페인에 330년간, 미국으로부터 44년간 식민통치를 받은 필리핀의 서글픈 역사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취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해적선 모양을 본뜬 바에서 필리핀산 맥주 ‘산 미구엘’(San Miguel)을 맛보는 것도 괜찮다.
7107개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국가답게 필리핀은 섬과 섬을 배로 연결하는 호핑투어가 잘 발달돼 있다. ‘아일랜드 호핑’(전세낸 배로 섬을 일주하며 스노클링 등 해양레저를 즐기는 관광)을 나가면 으레 타볼 수 있는 것이 ‘벙커.’ 벙커는 배 좌우에 대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달아맨 필리핀 고유의 목선. 보통 승선인원이 10명 가량에 불과하지만 웬만한 바닷바람에도 뒤집어지지 않는 안전성이 특징이다. 물보라를 일으키는 벙커 선상에서는 수면 위를 날듯 솟구치는 날치를 구경할 수도 있다.
다칵 비치 서쪽 끝자락의 다칵아쿠아스포츠센터를 찾으면 리조트 앞바다에서 요트, 제트스키, 스쿠버다이빙 등 각종 해양레저를 즐길 수 있다. 제트스키의 경우 30분 대여료가 30달러. 다소 비싼 편이지만 허니문 투어의 경우 해양레포츠 비용이 패키지에 포함돼 있어 추가 비용은 들지 않는다. 다칵 리조트에는 또 해양레포츠에 익숙지 않은 이들을 위해 3개의 실내 수영장과 3홀짜리 미니 골프장, 승마트레킹 코스, 볼링장 등 부대시설도 잘 갖춰졌다.
다칵 여행의 ‘옥의 티’라면 세부와 달리 서울 직항노선이 없어 디플로그 공항까지 가려면 필리핀의 모든 국내선이 경유하는 마닐라 아키노국제공항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점. 또 대나무와 코코넛잎으로 외형을 단장한 숙박시설이 일부 낡아 가족 휴양지로선 다소 부적합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특히 유난히 룸 컨디션에 민감한 한국인 관광객들은 호텔에 비해 세심한 배려가 부족한 객실(방갈로형 156실)에 적잖이 불편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2년 전 특별히 신혼부부들을 위해 해변에 인접한 비치프런트 스위트룸 12개를 새로 단장해 ‘보는 관광’ 대신 아늑한 휴식을 원하는 이들에겐 더이상의 적지가 없을 정도로 안성맞춤이다.
다칵 허니문투어는 지난해 2월부터 누비다투어(소장 유재옥·02-777-8366)와 필리핀항공(02-774-0078)에서 마닐라 관광을 겸한 4박5일(다칵 2박, 마닐라 2박) 코스를 취급하고 있다.
필리핀 관광 규정상 리조트 관광은 반드시 마닐라 시내관광을 포함하게 돼 있는데 필수 코스인 리잘 파크(호세 리잘의 유해가 안치된 공원)로 가는 도중 시내 곳곳에서 필리핀의 명물 교통수단인 ‘지프니’를 구경할 수 있다. 지프니는 미국과 에티오피아에 정글탐험용으로 수출되는 수작업 제조차량으로 필리피노(필리핀인)들의 뛰어난 손재주를 엿보게 한다.
필리핀은 빈부격차가 극심하지만 물가는 다소 싼 편. 1달러가 대략 45페소(1페소=약 25원) 정도다. 필리피노들은 대부분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며 붙임성이 있어 친근감이 느껴진다. 필리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현지에서 수없이 듣게 될 타갈로그어(필리핀 고유어) 인사말 하나쯤은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을 듯. ‘마부하이!’(Mabuhay·환영합니다)
< 필리핀 디플로그=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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