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특집② ㅣ '문화의 옷' 입히기 아름다운 실험

  • 입력 2001년 3월 12일 13시 18분


◇“딱딱한 다리는 싫다” 파주 헤이리 마을 교량 5곳 현상공모… ‘휴식공간’으로 탈바꿈◇

아름답게 지은 다리 하나가 마을이나 도시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놓을 수 있을까. 파리 센강에 놓인 36개 다리 가운데 동일한 디자인의 다리는 단 한 개도 없다. 크기에서는 보잘것없는 센강이 한강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강의 다리들 때문. 예술가들의 손길이 미친 아름다운 다리들이 센강과 파리 전체의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파리의 다리들은 건축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파리시민의 긍지를 표상하고 있으며 프랑스 정부는 ‘역사적 상징물’로서 다리를 보존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국가를 대표하고 사람과 호흡할 수 있는 다리를 만들기 위한 작은 움직임들이 시작됐다. 문화-예술 마을을 표방하고 경기도 파주에 들어설 ‘헤이리 아트 밸리’내에 세워질 다리들이 바로 그것. ‘헤이리 아트 밸리’(이하 헤이리)는 파주 통일동산지구에 15만평 규모로 조성되는 마을로 미술계를 비롯해 연극, 영화, 음악, 전통문화 등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이 마을을 지나가는 하천에 ‘문화의 옷’을 입은 5개의 아름다운 다리가 들어서게 된다.

헤이리 사업준비위원회는 지난해 마을 교량 5개에 대한 현상공모를 실시했다. 헤이리 다리 현상공모는 미학적 고려 없이 건설되기 일쑤였던 우리나라 교량설계의 역사에서 보자면 일대 충격이었다. 규모가 제법 큰 교량에 대해서도 현상 설계가 거의 없는 현실에서 15m에서 25m에 지나지 않는 작은 다리에 문화 예술적 숨결을 불어넣으려 하는 시도 자체가 전례 없는 일. 소규모의 교량에 대한 현상공모는 당연히 이번이 처음이다.

◇“주변환경과 조화 살아 숨쉬는 다리로”◇

지난해 8월 일간지와 건축미술 잡지에 현상설계를 공고하고 같은 달 19일 헤이리 현장에서 현장 설명회를 실시했다. 10월까지 접수된 작품은 총 34점. 심사에는 최만린 교수(서울대 미대), 이명환 박사(토목전문가), 우경국 교수(경기대 건축대학원) 등이 참여했다. 심사결과 당선작 2점, 우수작 2점, 가작 6점이 선정됐다.

헤이리 준비위원회가 교량 현상 공모를 한 것은 마을 전체가 다리 하나에 따라 전혀 새로운 곳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 “헤이리의 다리들은 마을 전체 풍경에서 오브제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주변환경과 조화될 수 있는 살아 숨쉬는 다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미학적으로 뛰어나고 아름답게 꾸며진 다리를 보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도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헤이리 건설위원회 이상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심사에 참여한 우경국 교수는 “그동안은 차량이 지나가는 운반수단으로서의 기능에 집중해 다리를 만들었지만 헤이리에서의 이번 시도는 심리-문화적 기능을 강조한 것”이라며 “이번 실험의 성과가 시발점이 되어 앞으로 전국에 아름다운 다리가 놓이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김기환씨(일본 와세다대학원 건축학과)의 ‘界의 다리’는 구조와 형태가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점과 환경조형물로서의 기능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바라보는 사람의 이동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보이게 설계돼 ‘공간 형성’의 미학이 뛰어나다. 헤이리를 밝힐 다리의 다양한 조명이 연출할 야경 또한 환상적일 것이라는 평가다.

또 다른 당선작 ‘休· 橋’는 차량과 인도교를 하나의 구조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단순한 통행의 공간 혹은 그냥 지나가는 공간이 아닌,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널 때 머물고 싶고 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능을 갖도록 계획됐다. 休· 橋를 제출한 박선우 교수(배재대 건축학과)의 작품 설명. “항상 복잡한 심리상태 속에서도 이 곳에서나마 안정을 찾고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다리가 주변환경과 어우러져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발하는 조형물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한강 둔치 아치형 보행자 전용 교량 내년 완공◇

당선작으로 선정된 작품들은 세부적인 실제 설계 과정을 거쳐 헤이리의 작은 하천에 세워질 예정이다. 설계 과정에서 작품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마지막 과제. 헤이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실험’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낼지 주목된다.

양화대교 인근 한강시민공원 둔치에서도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양화지구 둔치와 선유도를 잇는 보행자 전용 교량이 바로 그것. 한강에 최초로 세워지는 보행자 전용 교량이다. 기존에 보도육교가 있던 곳에 아치형 접속교량을 설치해 미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계획. 장애인과 자전거 이용자를 위한 램프와 엘리베이터도 설치된다. 이 다리의 기본 구상은 파리고등건축학교 초빙교수인 루디 리치오티가 맡았다. 발주기관인 서울시 건설안전관리본부 관계자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행자 전용 다리가 될 것”이라며 “한강 둔치를 산책하는 시민들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보도육교 구간에는 초록색의 투명 방음벽을 설치해 올림픽대로의 소음을 막고 목재 재질의 바닥 판을 깔아 보행자들에게 걷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다리 전체에 목재 마감재를 사용해 야간에 조명을 받으면 따듯한 느낌을 줄 계획. 산책하는 시민들이 한강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도록 다리 중앙엔 45cm 높이의 단차도 만든다.

백자의 선을 응용한 아치형의 교량과 수면반사광을 활용한 조명기법이 한강 주변의 야경과 조화를 이뤄 이 다리는 서울의 새 명소가 될 전망이다. 시공을 맡고 있는 동양고속건설 강부용 과장은 “신소재의 콘크리트(듀탈)를 사용해 슬래브의 두께가 얇아져 날렵하고 세련된 다리가 만들어질 것”이라며 “다리 양쪽에 여러 가지 색의 조명을 설치해 다리 중앙에선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될 것이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공사가 시작돼 현재 10% 정도 공정이 진행됐고 2002년 3월 완공될 예정이다.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겠다는 학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연세대학교 토목공학과는 매년 실시하는 모형교량 콘테스트에 지난해부터 미니어처 부문을 신설했다. 교량의 기능과 관련된 부분을 잠시 접어두고 주변 환경과 조화할 수 있는 아름다운 다리를 출품하게 한 것. 진도대교, 영종대교, 서해대교 등 일부 교량을 제외하고는 내세울 만한 다리가 변변히 없는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움직임이다.

모의교량 콘테스트를 주관한 연세대 이상호 교수(토목공학과)는 “안전성과 경제성이라는 기본적인 요소를 무시한 다리는 존재할 수 없지만 자연환경과의 조화 역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같은 학과의 김상효 교수는 “실제로 한두 개의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어 놓으면 기술력도 확보되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더욱 확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를 연결하는 다리들은 주요 관광 코스로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도쿄 인근 요코하마(橫濱)의 멋들어진 베이 브리지의 전망대는 시민들의 즐거운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우리도 ‘한국을 대표하는 다리’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기 위한 작은 움직임들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주간동아 제2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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