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인 박모씨(46)는 얼마 전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딸의 새학기를 맞아 함께 책상 서랍을 정리하던 중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학용품을 보고 ‘질려’ 버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가짓수가 워낙 많고 특히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쓰지 않고 버려진 공책, 필통, 다이어리 등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큰애 방은 무서워서 들어가지도 못하겠어요. 학교에 가면 사물함에 또 쓸 만큼 학용품들이 있고 새학기여서 틀림없이 몇 가지를 더 살텐데…. 도대체 ‘물자’에 대한 관념이 없어 큰일이에요.”
이날 박씨가 발견한 막내딸의 학용품은 △물감 12색, 18색, 24색과 크레파스 등을 합쳐 9세트 △쓰지도 않은 다이어리 12개(2년 전 한창 유행이어서 산 것인데 한장도 안 쓴 것이 10개) △노트 15권(대부분 앞의 2장만 적혀있는 새것) △사인펜 낱개 23자루와 선물 받은 12색짜리 4세트 △볼펜 연필 25자루 △형광펜 4개 △샤프펜슬 6개 △지우개 8개 △15㎝자 6개와 30㎝자 2개 △가위 5개 △스카치테이프 4개 △풀 3개 △컴퍼스 3개 △리코더 3개 등이었다.
“샤프가 왜 이렇게 많니? 심만 사면되잖아.”
“이건 키티고, 저건 디지몬이고, 그건 파자마시스터즈잖아….”
딸은 학용품이 여러 가지 캐릭터의 ‘팬시상품’이 때문에 한 물건을 다 쓴 후에 새 것을 구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공책은 특히 2, 3장 끼적이다가 만 것이 전부였는데 학교에 깜빡 잊고 안 가져갈 때마다 다른 공책을 한권씩 사 두었던 탓이다.
물감이나 크레파스 역시 자주 쓰는 색 2, 3개를 빼놓고는 아예 손도 안댄 것이 태반. 자나 컴퍼스 가위 스카치테이프 리코더 등은 “어디에 뒀는지 몰라서, 혹은 찾기 귀찮아서” 준비물이 들 때마다 샀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는 아이들 사이에 ‘몽당연필 만들기’ ‘색연필 심 가루만들기’가 유행해 딸이 연필을 일부러 부러뜨리고 연필깎이로 다시 깎는 과정을 반복하거나 색연필 심을 분리해 칼로 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하기도 했다.
박씨가 재직하고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를 하면 새로 산 듯 보이는 샤프 필통은 물론 고가의 탬버린 실로폰도 나온다. 하지만 다음날 “이거 누구거니”하고 아무리 물어도 주인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 누가 깨끗이 닦아서 쓸래”하고 물어도 마찬가지다. 엄마들도 그까짓 게 뭐 대수냐는 식이다.
박씨는 앞으로 딸이 학용품을 아껴 쓰거나 형제끼리 물려받는 게 무리라면 최소한 남아있는 물품은 다 쓰도록 유도할 작정이다.
“집안에서고 학교에서고 ‘근검절약’ 교육이 아예 실종돼 버린 것 같아 많은 반성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나라처럼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이 정도 정신무장도 안시키면 나라 경제인들 일어서겠어요?”
◇주부 정선희씨의 '절약교육'
“근검절약이 얼마나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인데요.”
주부 정선희씨(33·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는 지난날 ‘절약’은 강한 생활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그쳤지만 이제는 미래를 살아 나갈 아이들에게 치밀함 꼼꼼함 자제력 환경운동실천 등을 가르치는 미덕으로 변모했다고 역설한다.
딸 김성진양(8·중원 초교2)의 학용품 소비 습관은 또래들과 사뭇 다르다. 언젠가 학교에서 우산을 잃어버린 성진양에게 정씨는 3번씩이나 다시 찾아오도록 했고, 성진양은 학교 방송을 이용하는 등 ‘천신만고’ 끝에 우산을 되찾아 냈다.
학용품마다 이름을 써 놓고 용돈기입장을 쓴다. 낙서를 하더라도 공책이나 스케치북을 마지막 장까지 쓰는 건 기본. 집에서 굴러다니는 이면지를 4등분 해 수첩을 만들었다.
아이들사이에 형형색색의 다이어리가 유행하자 하나를 구입한 뒤 속지만 계속 바꿔 쓴다. 환경에 관심이 많아져 책상 앞에 ‘비닐은 완전히 썩으려면 XX년’이라는 문구를 스스로 써 붙여놔 엄마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성진양이 물감을 아껴 쓰도록 하는 과정은 가히 ‘미술교육적’이다. 분홍색이 일찍 닳아 버리면 흰색에 빨간색을 섞어 분홍색을 만들어 준다. 크레파스는 끝까지 쓰도록 몸통 부분을 단단한 스카치테이프로 감아준다.
‘근래 보기 드문’ 절약교육 덕분에 정씨는 얼마 전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와 YWCA가 주관한 이달의 가정교육실천주제선정 및 발표회에서 절약 정신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모범엄마’로 뽑혔다.
◇전문가 한마디…
경기 안산시 초당초등학교 이종숙 교감(52)은 ‘신세대 엄마’들의 ‘낭비 무감각’이 자녀들의 과소비 습성을 부추긴다고 꼬집는다.
이교감은 “10년전만 해도 학생이 도시락, 신발주머니같은 물건을 잃어 버리면 어머니가 학교까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학생과 어머니 그리고 선생인 나까지 나서 물건을 찾으러 다녔다”며 “지금은 한참 옛날 얘기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의 ‘풍요롭지 못한 정서’가 반대로 ‘풍요로운 물자’를 동경하는 자세를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연세대 신의진 교수(정신과)는 “자녀들이 집에 오면 가족들은 없고 친구들은 학원에 가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며 “허전한 마음을 예쁜 학용품으로 대신 채워 넣으려는 심리를 자극하는 것이다. 마치 어른들이 마음이 허할 때 쇼핑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분석했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