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산업디자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국인이 있다. 휴대용 디지털 제품 디자인의 최고로 꼽히는 ‘이노(INNO)’사 김영세 대표(52·사진). 세계 산업디자인의 심장이라는 실리콘밸리에 우뚝 선 디자이너다.
김씨는 해외에서 더욱 유명하다.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IDEA 금 은 동상을 모두 수상한 진기록 보유자다. 지난해에는 휴대전화와 개인용 디지털단말기(PDA)를 결합시킨 ‘스마트폰’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국내 업체가 개발한 이 제품은 ‘비즈니스 위크’가 선정한 ‘2000년 최우수상품’에 꼽혔다.
20년 디자인 외길을 달려온 그의 에세이집 ‘12억짜리 냅킨 한 장’(중앙M&B·8000원)은 흔한 성공스토리가 아니다. 자신이 얼마나 고생한 끝에 명예와 부를 이뤘는지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책 첫머리를 ‘나는 왜 이런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으로 시작한다.
“스타벅스 커피숍에서는 뜨거운 종이컵을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컵 바깥에 종이띠를 두릅니다. 제가 종이 홀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면, 전 벌써 백만장자가 되었을 겁니다. 아이디어의 가치는 이처럼 무한합니다.”
이처럼 냅킨 한 장에 쓱쓱 그린 아이디어가 100만달러짜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하면 아무 값어치가 없다. 그는 이를 현실화하는 힘을 ‘디자인’이라 부른다.
“디자인은 아름다운 겉모양만 지향하지 않습니다. 고객 입장에서 보기 좋게, 쓰기 쉽게 만들려는 고객 존중의 마음이 핵심입니다.”
이같은 철학은 IDEA 수상작에서도 엿보인다. 여행용 골프가방 ‘프로텍’, 세 발 달린 가스버너 ‘랍스터’, 잠금장치를 단 지퍼 ‘이노 지퍼’. 모두 편리함과 아름다움을 만족시키려는 고심의 산물이다.
그는 “디자인에 100점은 없다”고 단언한다. 고객의 필요와 기호는 항상 변하므로 미래의 디자인을 예측해야 고객을 붙잡을 수 있다. 지난해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디자인만이 오늘날 기업 경영에서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차별화 기회”라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의 ‘디자인 불감증’을 안타까워 한다. 그래서 복제에 너그러운 우리의 윤리의식을 꼬집고, 아이맥 컴퓨터 같은 세계적인 히트상품에서 디자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것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디자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디자인은 변화에 대한 도전정신입니다. 이것이 사회의 기본이 된다면 우리 삶의 질은 더 높아질 것입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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