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만남은 팬들을 사로잡는 한곡의 노래로, 한편의 시로 새 생명을 얻는다. 또 서로에게서 얻는 자극과 아이디어는 우리 문화계를 뒤흔드는 작품으로 탄생한다. 일과 삶의 동지로 살아가는 문화계의 ‘단짝과 콤비’, 이들의 사연을 찾아가는 새 시리즈 ‘우리? 문화동지’를 마련했다.<편집자>
“방울새는 인간에게 잡혀 새장에 갇힌 새끼에게 독을 물어다 준대. …가정은 내게 새장이었어.”
23일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당신, 안녕’의 마지막 장면. 극중 유명 극작가이자 교수인 독고(이호재·60)는 아내(배유정)와의 이혼도, 젊은 애인(장설하)과의 새 출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관객들을 향해 “죽음을 통해 난 처음으로 자유를 얻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날 공연장에는 이호재의 팬 클럽인 ‘빨간 소주’ 회원 10여명이 단체로 관람하고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뒤풀이를 가졌다.
▲뺨 괜챦으세요
공연이 끝나자 회원들이 분장실로 몰려가 “선생님, 멋졌어요”라는 찬사를 보내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 이호재를 둘러쌌다.
“뺨은 어떠세요?”
회원들의 짓궂은 걱정이 이어졌다. 애인과 아내가 이호재의 뺨을 두차례나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기 때문이다.
“허어, 뭘∼.”
이 모임은 배우 공연기획자 무대감독 조명 가수 등으로 구성된 이호재의 팬 클럽. 팬 클럽 자체가 드문 연극계에서 ‘빨간 소주’는 ‘희귀종’이다.
▲빨간 소주?
왜 ‘빨간 소주’일까. 이 모임은 △빨간색 병뚜껑을 가진 소주만 마시고 △술잔은 맥주 컵을 사용하며 △참석자들은 각자 1병씩 먹되 다른 사람에게 절대 술을 권하지 않는다는 회칙을 갖고 있다. 모임 이름은 이 ‘빨간 색 뚜껑’에서 따온 것.
이런 회칙은 이호재의 평소 음주 습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호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의 음주 습관에 힌트를 얻어 팬클럽 명칭에 ‘빨간 소주’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회원들의 설명.
이 모임은 지난해 3월 연극 ‘불 좀 꺼주세요’에 참여했던 권재희 장설하 등 배우와 공연기획사 ‘컬티즌’의 정혜영실장, 조명감독 신호 등 20여명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여기에 ‘윤도현 밴드’ 출신의 가수 엄태환, 의상디자이너 이승무, 연극 ‘툇자 아저씨와 거목’에서 함께 공연한 배우 장연익 등 이호재와 인간적 유대를 맺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정기모임은 따로 없다. 대신 이호재가 대학로에 ‘뜨면’, ‘번개팅(사전 약속없이 연락해 만나는 것)’으로 모인다.
▲무서운 빨간소주
“이 나이에 무슨 팬 클럽…. 마음 편한 후배들과 술 한잔 하면서 연극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는 거지.”(이호재)
정혜영 실장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연극을 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면서 “40년 가깝게 굳건하게 연극을 지켜온 선배와의 만남을 통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자양분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모인 덕분에 뒤풀이에서 벌어지는 갑론을박은 연기 의상 조명 무대 등 연극의 전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러다 극중 이호재의 애인으로 출연한 장설하에게 회원들의 화살이 날아갔다.
“이호재 선배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야하게 보이려면 셔츠 차림만 해야지, 왜 셔츠 밑에 반바지를 받쳐 입었어? 어색하잖아”
난처한 표정을 짓던 장설하는 “그게 제작진의 주문”이라며 우물거린다.
소주를 명칭으로 내건 ‘빨간소주’의 ‘무서움’은 뒤풀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누군가 창틀에 걸쳐 놓은, 소주 뚜껑으로 만든 줄이 계속 길어졌다. 하나 둘 셋…스물 둘. 어느 순간 기자도 더 셀 능력이 없어 포기해야 했다.
며칠 뒤 ‘빨간 소주’측은 “모임의 이름 때문에 음주 클럽으로 비쳐져 모임의 긍정적인 취지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면서 “‘빨간 소주’가 아니라 ‘이호재를 사랑하는 모임’으로 명칭을 바꾸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뜻을 전해왔다. 공연은 4월4일까지 화∼토 오후 7시반, 일 오후 3시 6시. 2만원. 02―745―9884
#'빨간 소주' 회원들의 말 말 말
●“선생님, 그 강렬한 눈빛으로 한번 쏴주세요.” (‘빨간 소주’ 회원들)〓이호재가 사진기자를 위해 포즈를 취하자.
●“우리 모임은 사모님께서 ‘공인’한 팬 클럽입니다.” (컬티즌의 정혜영실장)〓언젠가 연극계에서는 서울 명륜동 이호재의 집에서 봤다는 달력 아닌, ‘주력(酒曆)’의 존재가 화제였다. 부인이 일년 중 이호재가 술 먹은 날을 빼곡하게 표시한 것. 그렇지만 ‘빨간 소주’와의 회동은 예외라며.
●“허리 관절 수술했는데도 참가했습니다.” (가수 엄태환)〓지팡이를 쓰면서도 빠지면 잘릴 것 같아 모임에 나왔다며.
●“팩시밀리로 생일을 적은 명단을 보낼 겁니다. 제가 증인입니다.” (인터넷 영화 ‘극단적 하루’의 주인공 김대령)〓기자가 엉겁결에 이날이 생일이라고 발설하자 ‘빨간 소주’ 회원들이 즉석 생일 파티를 열어줬다. 이에 감격한 기자가 모임에 참석한 17명의 생일을 모두 챙기겠다는 ‘취중 실언’을 하자 이를 확실하게 기억한다며.
<김갑식기자>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