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발아래 세상보다 '외줄인생'이 더 행복해요
22일 오전 따사로운 봄볕이 가장 먼저 와닿는 듯한 서울 신촌 로터리의 고층빌딩 옥상. 15층 빌딩의 외벽청소를 하루 동안 맡은 3인 1조의 로프맨들의 준비작업이 부산하다. 로프의 매듭을 묶고 청소도구를 준비하며 폭 30㎝ 안팎의 빌딩 난간을 마치 평지를 걷듯이 오간다.
아래쪽에 베란다가 있나 하고 다가가 봤더니 그냥 수십미터 낭떠러지다. 간신히 목을 내밀고 내려다만 보는데도 오금이 짜릿하게 저려온다.
2년 전 용역업체를 하는 친지의 권유로 일을 시작한 이종진씨(25)가 난간에서 로프에 매달린 깔판으로 가뿐히 뛰어내린 뒤 줄을 풀기 시작했다.
“안 무섭냐고요? 익숙해지면 오히려 로프를 타고 앉아 있을 때가 가장 편해지지요.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잖아요. 서 있는 거보다는 앉아 있는 게 더 편하죠.”
이씨의 소개로 지난해부터 로프를 타기 시작한 유정희씨(25)는 ‘신세대’답게 “높이 올라갈수록 짜릿한 재미가 느껴진다”고 한술 더 뜬다.
한사람이 1∼1.5m의 폭을 닦으면서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여분. 이 정도 빌딩이야 10여차례 오르내리면서 하루 만에 일을 마칠 수 있지만 63빌딩처럼 보름 이상 달라붙어야만 하는 대형빌딩도 있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해서 받는 하루 일당이 10∼12만원. ‘노는 철’이 많기는 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 하지만 밑에서 쉽게 보인다고 뛰어들었다가 옥상에 한번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도망가버리는 이들이 열에 아홉이다.
로프맨들은 작업하기에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보조밧줄이나 헬멧 등 특별한 안전장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7년 전 로프를 타기 시작했다는 베테랑 강창완씨(28)는 “로프를 타다 줄을 놓치거나 끊어져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동료나 빌딩 경비원이 사람 매달려 있는 줄 모르고 밧줄을 풀어버리는 경우처럼 엉뚱하게 사고가 벌어지기도 하죠.”
하지만 출근길에 신발끈이 풀리거나 계단에서 헛발질을 해도 하루종일 마음이 찜찜하다. 꿈자리가 사나우면 아예 하루를 쉬기도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좀처럼 가족에게 알리지 않는 것도 특징. 로프를 탄 지 10년이 넘도록 아내나 부모들이 모르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내만 500∼600여명의 로프맨들이 일하고 있다.어쩌다 한 해에 한두번씩은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지만 애써 무심하게 넘긴다.
“땅 아래에서도 재수없으면 사고는 당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래도 각박한 저 아래 세상보다는 속이 편하죠. 그냥 정직하게 일한만큼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외줄타기 7년 만에 세상을 달관한 듯한 강씨가 로터리에서 개미떼처럼 밀려다니는 인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외벽청소 15년 베테랑 고운철씨 "경찰 출동 봉변당하기도…"
산이 좋아 산을 타다 결국 줄타는 일이 직업이 됐습니다.”
15년째 고층빌딩 외벽청소를 해오면서 이 업계에서는 ‘베테랑’소리를 듣는 고운철씨(38·사진)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가 ‘산에 미쳐’ 젊은 날을 보냈다. 졸업 후에도 각박한 직장생활이 맞지 않아 결국 아르바이트 삼아 일하던 로프타기가 직업이 됐다.
지금은 10여명의 로프맨들을 모아 차린 ‘미래개발’이라는 작은 용역업체의 ‘사장님’이지만 일손이 부족하면 서슴없이 로프에 몸을 맡긴다. 암벽타기와 빌딩 로프타기의 차이 가운데 하나. 빌딩에서는 유리창 안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를 내려올 땐 가끔 커튼을 열어놓고 애정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어요. 몇 차례나 안내방송을 했는데도 오히려 그 쪽에서 경찰에 신고를 해 봉변을 당하기도 하죠.”
초창기에는 자신보다 나이 어린 재벌2세의 수십억짜리 별장에 일을 나가 호화찬란한 내부를 들여다보고 한참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한 해에 한차례씩 어김없이 히말라야행을 위해 배낭을 꾸린다는 고씨는 “산은 밑에서부터 올라가고 빌딩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뿐, 저 아래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없이 작게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