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서두칠과 한국전기초자 사람들/1만1800원, 297쪽/김영사

97년 12월6일 새벽 1시. 한 남자가 경북 구미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우전자 부사장으로 근무하다 부실투성이의 그룹 계열사인 한국전기초자의 경영을 맡기위해 내려온 서두칠 사장이었다. 한국전기초자는 TV와 컴퓨터 모니터의 유리를 만드는 회사. 양말 두 켤레, 와이셔츠 한 벌이 든 가방을 달랑 든 서 사장은 즉시 공장으로 향했다.

새벽에 방문한 공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해 여름에 일어났던 파업의 후유증으로 온 벽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살벌한 구호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어두침침한 공장 내부에서 밤 근무하던 직원 가운데는 담배를 피우거나 조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공장 곳곳에 쌓여있는 재고품….

3480억원의 차입금, 자본금의 1114%에 이르는 부채비율, 6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해 당시 퇴출 0순위에 오른 회사다운 풍경이었다.

신임 사장의 예상치 못한 새벽 방문에 서둘러 공장에 나온 간부들에게 서 사장은 말했다. “회의 시각은 오전 6시입니다. 그때 봅시다.”

이 때부터 서 사장은 회사의 모든 걸 바꿔나갔다. 사장을 비롯한 직원들은 추석 설 연휴도 없이 365일 일에 매달렸고, 공장은 필요없는 설비와 재고품을 모두 치워 먼지 하나없이 깨끗하게 변했으며, 모든 회사 정보는 공개됐고, 사장과 직원간에 수시로 대화의 자리가 마련됐다. 조금씩 바꿔나가는 개혁이 아니라 모든 걸 송두리째 바꾸는 혁신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2000년말 한국전기초자의 경영 성적표는 ‘차입금 0, 부채비율 37%, 1717억 흑자, 영업이익률 35.35%’로 상장업체 중 1위.

한국전기초자는 대우그룹의 부실로 99년 일본의 아사히글라스로 매각됐다.

회사와 직원들을 과거의 구태에서 변화시킨 서 사장의 리더십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중 하나만 꼽으라면 ‘솔선수범’의 미덕이다. 직원들에게 뼈를 깎는 노력을 요구하기 전 사장이 먼저 뼈를 깎는 노력을 했고, 365일 현장에서 살았다. 그리고 사장실에는 둥근 원탁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