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
시인 구상(具常)은 일찍이 “원혼(·魂)의 나라 조국아,/ 너를 이제까지 지켜온 것은/ 비명(非命)뿐이었지”라고 노래했다. 비명이 지켜온 이 민족의 역사는 기억하기엔 너무 괴롭지만 망각하기에는 너무 귀중한 자산이다.
‘한티재 하늘’(권정생 지음·지식산업사·1998년)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부터 1937년까지 몇 가족의 4대에 걸친 삶을 진정한 서민의 어휘와 억양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1937년생인 작가가 19세기 말부터 해방 전까지 민초들의 일상생활과 통과의례, 그리고 갖가지 생업에 대해 그렇게 상세하고 정확히 알고 있고, 그토록 현장감 있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수십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에게 각각의 개성과 심성을 부여했다는 것은 정말 경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갑오농민전쟁, 국모(國母)시해, 한일합방과 일제의 수탈, 모진 질병,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앙, 끈질긴 가난, 생이별과 사별 등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대부분의 민초들은 그저 뼈 빠지는 노동으로 운명에 순응하며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각각의 개성이 있고, 의리와 인정이 있으며, 애달픈 사랑도 있었다.
시아버지와 남편, 모두 ‘빤란구이’(叛亂軍)로 일찍 죽고, 아들만 희망으로 키우며 살았으나 아들도 피를 속이지 못해 저항운동을 하면서 밖으로만 떠돌아 서럽고 며느리에게도 미안한 복남이. 자기 집 문 앞에 쓰러진 계집종과 사랑을 해 산 속으로 도망쳐 화전을 일구며 일생 성실하게 일해도 가난을 면할 길 없는 이석이.
내키지 않는 시집을 갔어도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식솔 많은 살림을 꾸려가지만 시아버지의 병구완 때문에 빗을 지자 남편은 도박으로 집을 날린 뒤 징용에 끌려가고, 아이들과 낯선 타지에서 모질게 품 팔아도 살 수 없어 밀주를 빚다가 발각되어 벌금형을 받고, 벌금 때문에 몸을 팔고,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남편의 소식이 왔을 때는 하룻밤 매춘으로 인해 만삭의 몸이 된 이순이….
모두들 문자 그대로 ‘죽어라고’ 일하고, 그래도 굶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굼기 있다 안카나”하는 속담에만 의지하고 산다. 너무도 고달픈 삶이기에 나병환자 아들이라도 있는 것이 악에 받쳐 살게 하고, 미워할 대상이라도 있는 것이 맥을 놓지 않게 도와주는 삶. 그러나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살림에도 최소한의 법도가 있고, 인간의 도리가 있고, 무엇보다도 일부러 마련하지 않아도 끝없이 솟구치는 정이 있다.
‘한티재 하늘’은 우리의 근원, 민족의 고향에의 순례이다.(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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