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매료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다.
태어나 줄곧 ‘압구정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탈출구를 찾던 그는 결혼 후 유럽과 리비아 미국에서 10년 넘도록 생활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야트막한 언덕에 작은 시내가 흐르는 가운데 작은 숲을 이루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게 됐다.
“주위 지형으로 보면 이런 나무가 자연적으로 생기기 어려울 텐데 어떻게 이같은 숲이 생겼나요” “아, 보기에 좋으라고 우리 선조들이 심었지요.”
벨기에 농부로부터 이같은 말을 듣고 그도 ‘내 손으로 직접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단풍 구상 라일락 등 매년 90여그루씩의 묘목을 심었고 올 들어는 벌써 60그루를 심었다.
가끔은 애써 심은 나무들이 누군가에 의해 도둑을 맞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낙담하지 않는다.
“누군가 잘 파가서 어딘 가에선가 기르고 있겠죠.”
그는 꼭 내 울타리 안에 있어야만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이 그 대상을 사랑한다면 어느 곳에 있든 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늘 부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눈에 들어오는 높은 산의 멋진 나무, 하늘이나 좋은 음악, 모든 게 내 것 같거든요.”
일산신도시 개발에 맞춰 입주했던 그의 가족은 94년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 98년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교육이민을 못 가서 난리통인 요즘 세태와 정반대로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고교생인 큰딸은 영어가 유창하지만 미국에서 A였던 수학 성적은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으로 떨어졌고 다른 과목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됐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만 말하고 나와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재미가 없다’는 딸아이의 지적이 한국식 교육을 잘 대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는 “외국에서 살면서 내 나라에서 모국어로 말하면서 사랑하는 친구 이웃과 함께 때로 다투고 때로 화합하며 알콩달콩 거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면서 “공부는 다소 떨어져도 활짝 웃는 내 아이와 생활하는 게 좋듯 예쁜 나무들과 내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동영기자>arg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