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약수’로 불리는 고로쇠약수와 거제약수가 봄을 맞아 한창 물이 오른 채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올겨울은 추위가 심한데다 눈이 많이 내려 예년에 비해 질좋은 수액을 많이 채취할 수 있다는 것. 끝물의 아쉬움을 남겨주는 고로쇠약수와 4월 한달 동안 제철을 만난 거제약수 채취 현장 탐험.
“물 먹었어요?”
“예, 오늘 물 좀 먹었어요. 허허~.”
물 먹었다? 흔히 이 얘기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주고받는 말 아닌가! 근데 ‘물 먹었다’는 소릴 하면서도 마냥 즐거운 표정이라니…. 내심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그려’ 했는데… 그건 외지인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새봄을 맞아 고로쇠물이 한창인 지리산 일대의 사람들은 바로 “물 먹었느냐”가 인사였던 것.
매년 경칩(3월5일)을 전후해 지리산 일대에서는 그야말로 ‘물만난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전국 어디서나 고로쇠약수를 채취하긴 하지만 ‘고로쇠물’ 하면 뭐니뭐니해도 지리산 일대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일종의 고로쇠약수 원조라고나 할까?
고로쇠 약수는 단풍나무의 일종인 고로쇠나무의 몸통에 상처를 내어 뿌리에서 줄기로 올라오는 물을 인위적으로 채취해 얻는 것으로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전국의 고로쇠나무들이 ‘몸살’을 앓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고로쇠나무에 도끼로 ‘난도질’을 해 물을 빼 먹었다. 그로인해 몸통 군데군데에 흉측한 상처를 안고 있는 고로쇠나무가 가엾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즘은 엄격한 채취 허가 기준으로 인해 나무들마다 ‘무식한’ 도끼 상처 대신 가냘픈 여인의 새끼손가락 굵기만한 구멍을 살짝 뚫고 링거액 호스 비슷한 것으로 물을 빼내 그나마 다행이다.
이처럼 ‘인간의 잔인성’을 죄없는 나무에까지 드러내는 이유는 그만큼 고로쇠약수의 뛰어난 ‘효험’ 때문이다. 항간에 알려져 있기로 고로쇠약수에는 당분, 철분, 망간 등 각종 미네랄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어 여성들의 산후병이나 신경통, 위장병, 고혈압, 비뇨기 계통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얼마전 한 미생물학전공 대학원생은 ‘고로쇠가 종양세포를 억제하는 항암물질을 함유하고 있다’는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로쇠약수에 관한 전설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도선국사의 골리수설’과 ‘노인과 토끼설’.
전자는 도선국사가 광양 백운산에서 수행하여 득도를 하였으나 무릎이 펴지지 않아 나뭇가지를 잡고 일어서는데 가지가 부러지면서 그 안에서 물이 나와 마시니 무릎이 펴지고 원기가 회복되었다고 하여 ‘뼈에 이로운 물’이라 골리수(骨利水)로 전해지기도 한다는 것.
후자는 옛날에 한 노인이 산길을 걷다가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가 없던 참에 마침 토끼가 나무에서 목을 축이고 가는 것을 보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나무에서 물을 받아 며칠간 마셨는데 부러진 뼈가 다시 붙고 원기를 회복했다는 것이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고로쇠약수가 그만큼 인체에 이롭다는 얘기다. 듣고보니 꼭 ‘만병통치약’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렇게 좋다는데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지나칠 수 있으랴. 고로쇠약수가 한창인 전남 구례, 광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물론 고로쇠약수를 사서 마시는 경우도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대개 음식점에서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 걸치면서 물을 마시는데, 아예 한말짜리 물 한동이(대개 4만~5만원)를 옆에 놓고 대접으로 수시로 마신다. 그것도 ‘원샷’으로. 찔끔찔끔 마시면 효험이 떨어진다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그곳 토박이들과 자리를 같이해 시음해보았다. 맛이 약간 달착지근했다. 마침 목도 말랐던 김에 첫사발을 벌컥벌컥 ‘원샷’으로 들이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한잔은 정도 없고 효험도 없다며 연거푸 ‘원샷’을 권하는 그네들. 어쨌든 시켜놓은 물 한동이는 다 마셔야 한단다. 그래야 체내에 있는 노폐물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기왕 마시는 거라면 제대로 한번 마셔보자는 마음에 대여섯 사발을 원샷으로 들이마시다 보니 마치 ‘물고문’ 당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속은 편안했다. 고로쇠약수는 아무리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는 희귀한 약수로 알려져 있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닌듯 싶다. 게다가 그렇게 물과 함께 마시는 술은 취하지도 않는다면서 특히 애주가들이 즐겨 찾는단다.
광양에서는 고로쇠약수를 알리기 위해 아예 약수제를 지낸다. 지난 3월7일 광양 약수제가 열리던 날은 눈발을 동반한 매서운 꽃샘추위가 살갗을 파고 들었건만 많은 사람들이 백운산으로 올라와 무려 1시간이 넘는 제례 행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 모두가 고로쇠약수를 ‘정성스럽게’ 마시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기까지 했다.
산에 있는 나무라고 해서 너도나도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것은 금물. 나무마다 임자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산주인이나 관계자에게 사용료를 주고 채취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나무를 잘못 건드렸다간 봉변당하기 딱 좋다.
구례군청 공보실의 김인호씨는 “너도나도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도록 놓아두면 아마 나무가 살지 못할 것이기에 채취를 제한하고 있다”면서 “특히 올해는 지리산 반달곰이 발견되기도 했고 나무가 유난히 몸살을 앓아 산림청에서 고로쇠약수 채취를 금지시키려고 했지만 어려운 농가 살림에 도움이 되다보니 전면 금지는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고로쇠 수액이 어떻게 채취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백운산 밑에 살고 있는 고로쇠약수 채취인 정기수씨(68)와 무려 8백m의 산길을 올랐다. 만만치 않은 산길을 오르느라 힘도 들었지만 역시 산 속의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고로쇠물은 일교차가 클수록 많이 나온다고 한다. 보통 밤의 기온이 영하 3~4℃, 낮에는 영상 10~15℃ 정도로 일교차가 15℃ 이상 되어야 한다는 것.
“근디 이 고로쇠물이라는 거이 기후조건이 알맞으면 우리가 낫질하다 손 베었을 때 피 나오는 거 맨치로 폴폴 나오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주 받아내기가 힘들어. 이게 아주 까다로운 물이여. 주야(밤낮)로 따시도 안되고 추워도 안돼. 이것이 오전 10시경이나 돼서 물이 나려고 하다가도 조금만 추워지면 안나와. 바람만 불어도 안나와. 찔끔찔끔 나오는 물 받으려면 성질 급한 사람은 하지도 못해. 근데 나가 인제 읍내로 나갈 거인디 살다가 본께로 생계가 좀 어려워서 고로쇠나무를 믿고 올라왔제. 이거 한 지가 37년이여.”
산에 올라오자마자 나무에 꽂혀있는 물받이 호스부터 점검하던 할아버지. 추운 날씨로 물방울이 잘 흐르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기자의 눈으로 봐도 그야말로 ‘피같은 물방울’이었다.
고로쇠나무마다 호스는 두 개씩만 꽂혀있다.
“산림청에서 나무가 암만 커도 두 구녕(구멍) 이상은 못 파게 해. 구멍 깊이도 1.5cm 이상 뚫으면 안돼. 산림청 지시가 아주 강력해. 그전엔 도끼로 상처를 내서 깡통으로 받았제. 봐 이게 다 아야자국(도끼자국)이야.”
나무에 꽂힌 호스는 길게 이어지면서 아래쪽의 물통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물통들이 쇠창살 안에 ‘갇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등산객들이 오다가다 마시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물인심이 이리도 흉할까 싶지만 그게 아니다.
“그냥 두면 다 훔쳐가버릴 거인디. 안되제. 예전엔 산에 오는 사람들이 오다가다 먹었지만 이제는 유명해져서 안돼. 이게 우리 밥줄인디. 그냥 한두모금 마시고 가기만 하면 좋은데 해꼬지를 허는 거여. 그 양반들이 무슨 행패를 부리느냐면 이걸(호스) 덮어놓고 빼버려. 빼기만 하나? 호스를 나뭇가지에 던져 걸쳐버리질 않나, 호스를 연결하는 코르크를 빼서 아무데나 휙 버리면 찾지도 못해. 그렇지 않으면 물통에 연결되는 호스를 잘라 소주병을 받쳐놓질 않나, 심지어 오줌 누고 가는 사람도 있어. 등산 다닌다 싶으면 그래도 배울만큼 배웠고 알 만한 사람들일틴디 그러면 쓰나. 난 해방 이후 국민핵교(초등학교) 5년밖에 안다녔지만 우리네 사람들보다 못혀. 그러니까 난 등산객은 통 꼴보기가 싫어.”
이렇듯 최근들어 인기가 높은만큼 ‘유명세’를 톡톡히 치러야 하는 고로쇠약수. 하지만 적어도 농민의 ‘피같은’ 고로쇠약수 채취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될 듯 싶다. 또
한가지 아쉬운 건 고로쇠약수가 한창인 기자의 취재 시기와 독자들이 직접 접하는 시기가 아슬아슬하게 엇갈린다는 점. 기사 출고 시기에 맞춰 취재하자니 물이 안나오고, 물 나올 때 현장을 돌아보고 나니 기사가 나올 때쯤이면 한철이 끝난다. 다만 3월15일까지 채취되는 고로쇠물의 보관 상태가 양호하다면 3월말에서 4월초까지는 고로쇠약수 맛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쉽긴 해도 명심해두었다가 내년을 기약해도 좋을 듯.
아무리 그렇다고 운이 좋아야 아슬아슬하게 맛볼 수 있는 고로쇠약수만을 위해 현장을 다녀올 수는 없는 법. 고로쇠물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약수로 꼽히는 수액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 이름하여 거제수나무에서 흘러나오는 거제약수가 바로 그것. 거제약수의 채취방법은 고로쇠나무와 똑같다. 채취 시기는 고로쇠에 이어 4월초에서 4월말까지. 물론 이것도 아무나 채취할 수는 없다(거제약수를 맛보려면 채취인에게 연락하는 것이 좋다).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이 나무는 지리산, 가야산, 백운산 등의 고지에서 자란다. 거제수나무는 따뜻한 봄기운이 무르익으면서 만물이 소생할 즈음 광합성을 하기 위해 땅속에서 물을 빨아올려 피어날 잎으로 올려보내기 시작한다. 이는 특히 절기상 곡우(4월20일) 때 가장 물이 올라 ‘곡우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 물은 심산의 맑은 물을 나무가 일단 빨아들여 고도의 필터장치라 할 수 있는 세포막을 통과한 수액으로 미네랄을 비롯한 무기물이 풍부한 최고의 건강음료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거제약수가 알려지지 않았던 건 고로쇠철이 지나간 4월이면 으레 사람들이 물을 찾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고로쇠의 후광에 가려져 있었던 것. 때문에 고로쇠약수만큼 상품화도 덜 되어 있다. 유명해진 고로쇠약수는 택배판매(18ℓ에 5만~6만원)까지 하지만 거제약수는 산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현지에서만 판매하고 있다. 가격도 보통 고로쇠약수보다 약간 싼 편이다.
구례군청에서는 매년 곡우에 맞춰 지리산 남악제 행사를 치르는 가운데 거제약수제를 지내고 있다. 지리산 남악제는 삼국시대때부터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내온 제례행사로 지리산 일대의 영약으로 이름난 거제약수를 바쳐왔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4~5일에 걸쳐 진행되는 지리산 남악제 행사중에는 향토음식축제를 비롯해 씨름대회, 군민노래자랑, 농악놀이, 각종 체육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진다(문의 061-780-2223).
약수를 마시고 난 후 구례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하동까지 이어지는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리는 멋도 기가 막히다. 아침 저녁으로 그 풍경이 다르고 계절마다 그 모습이 독특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섬진강. 마치 다림질해놓은 듯 매끄럽고 잔잔한 수면과 강 군데군데 펼쳐져 있는 모래밭이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특히 새벽 안개의 신비스러움에 싸인 섬진강의 모습은 한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섬진강과 은어는 도저히 뗄 수 없는 관계. 맑디맑은 물에서만 살아 그 옛날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섬진강 은어는 그 명성이 외국에까지 알려지면서 일본의 강태공들도 매년 은어낚시를 하기 위해 섬진강을 찾는다고. 어린 시절을 바다에서 보내고 4월초에 강을 거슬러 올라와 산란장소를 찾는 섬진강 은어는 5월초부터 8월까지가 성어기란다.
이쯤 되면 무르익은 봄을 맞아 한번쯤 지리산약수와 섬진강 은어가 있는 전라남도 기행을 떠나보는 것도 ‘탁월한 선택’이 될 듯 싶다.
<글·최미선 기자, 사진·박창민(프리랜서)>
(여성동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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