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제 서품 70주년 맞은 임충신신부

  • 입력 2001년 4월 12일 18시 42분


사제서품 70주년 기념미사에 참가한 임충신 신부
사제서품 70주년
기념미사에 참가한
임충신 신부
◇열살때 신학교로…천주와 함께 80여년

“열 살 때 신학교에 들어갔어요.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철부지 어린아이가 평생 독신의 신부로 살아간다는 게 뭔지나 알았겠어요?”

1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사제 서품 70주년 기념식을 가진 임충신(林忠信·94)신부는 귀가 어두워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큰 글씨로 종이에 써서 ‘왜 신부가 됐느냐’고 묻자 돋보기로 한참 들여다 본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요즘이야 중 고등학교 다 졸업하고 철이 나서 신학교를 가지만 그때는…. 1917년 어느 날 아버지가 부르더니 ‘불란서 신부님이 오셔서 왜 신학교에 가려 하느냐고 물어보면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라’고 해 그대로 대답했지요. 학교에 들어와 보니 저보다도 어린 여덟 살, 아홉 살짜리도 있더군요.”

서울 용산에 있던 그 신학교의 모습을 그는 3년 전 펴낸 책 ‘노 사제가 만화로 남기는 신학교 이야기들(가톨릭출판사)’에 소개했다. 이 중 한 대목.

“우리 담임 신부님은 아릭수 김 신부님인데, 성격이 급하고 엄격해 학생들이 무엇을 잘못하면 꾸지람을 하시는데 꾸짖는 말씀은 한국말 라틴말 불란서말 세 나라 말이 한데 섞여 있었다.”

임신부는 1931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때의 일을 물었더니 대신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42년 황해도 곡산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을 때였어요. 촌마다 공소라는 곳을 두고 봄 가을로 방문해 고백성사를 보는데 그 때마다 일본 순사가 찾아와 ‘신자들이 고백하는 죄를 낱낱이 적어 보고하라’고 요구하더군요. 어떤 순사는 시시한 죄만 보고할까봐 아예 걸상을 옆에 갖다놓고 앉았어요. 나는 신자에게 고백 대신 기도문 두어 개를 외우게 한 뒤 내보내고는 ‘아무개는 삼위일체축일 예수님승천축일 성령강림축일 성모승천축일 성모무염시태축일 못지키고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축일…’하면 순사는 ‘신부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며 벌떡 일어나 경찰서로 가버렸지요.”

해방이 되고 38선이 가로막히고 6·25전쟁이 터졌다. 황해도에는 신부가 15명 있었는데 10명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곡산이 수복된 후 국군 환영식에서 만난 참모장이 초대해 숙소로 찾아갔더니 마침 부하 하나가 ‘평양이 수복됐다’는 소식을 알려왔어요. 참모장은 기뻐서 ‘술 있는 대로 다 내오라’고 했습니다. 빨갱이 치하에서 5년 이상 술을 못 먹다 마시니까 아주 맛있어서 장군이 따라주는 술을 다 마셨지요. 그동안 못 본 동창 신부들도 보고 싶고 해서 다음날 참모장과 함께 짚차를 타고 아침 일찍 곡산을 출발해 저녁 무렵 서울 명동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서울에 머물던 중 중공군이 개입했고, 결국은 곡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교구를 잃어버린 그는 이후 충청 경기 서울의 성당들을 떠돌다가 68년 은퇴했다. 현재는 경기 일산 정발산 기슭의 아담한 주택에서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와 누이, 교우들을 생각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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