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vs 386]숙대 이만열교수-사학도 안효상씨 대담

  • 입력 2001년 4월 17일 18시 34분


《1960년 4·19혁명과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꿔 놓았다. 역사 연구는 현실과 민족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4·19세대인 이만열 숙명여대교수(63·한국사·사진왼쪽)와 386세대인 안효상씨(38·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서양사), 두 역사학 전공자가 만나 그 공과를 살피고 한국 역사학의 미래를 전망해보았다.》

▽이만열〓저는 1957년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59년도에 군에 입대해 군대에서 4·19를 맞았습니다. 3·15 부정선거가 있고 나서 4월에 첫 휴가를 나왔는데, 19일 아침 일찍 귀대하느라 4·19 현장에는 없었어요. 전 원래 목사가 되고 싶었는데 4·19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목사를 해도 우리 역사를 아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 때부터 한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안효상〓저는 우선 4·19세대 386세대라는 용어가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상업적 용어 같습니다. 지난해 총선 때 30대 출마자들이 마치 ‘386세대’라는 것을 무슨 기득권처럼 내세우는 걸 보고 안타까웠어요.

▽이〓학문적으로 보면 4·19의 의미는 민주주의의 회복, 민족주의 가능성의 발견이라고 볼 수 있어요. 역사학적으로는 민족주의사학의 출발이었습니다. 즉 일제식민주의 사학이 남겨놓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었죠. 61년 이기백 선생이 ‘한국사론’ 서문에서 일제 식민사관을 비판한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60년대는 식민주의 사관 청산을 위해 몸부림쳤던 시기였고, 그 경향은 70년대로 이어졌습니다.

▽안〓80년대 젊은이들은 4·19가 다소 낭만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어요. 좀더 과학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87년 6월항쟁에서도 드러났듯이 80년대 학생운동의 성과라면 학생운동이 추구했던 운동의 방향이 옳았다는 점과, 역사가 바뀌려면 학생 뿐 아니라 다수의 국민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이〓70년대까지 역사학에서는 일제시대, 가령 친일파 문제 같은 것이나 독재에 관한 것은 전혀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금기를 깬 것이 386세대였지요. 일종의 학문의 혁명이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역사학이 가능해졌습니다. 북한 학계의 연구성과가 소개된 것도 빼놓을 수 없구요.

▽안〓저는 서양의 68혁명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68혁명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해방의 프로젝트입니다. 권위주의의 타파, 자율성의 발현이죠. 그러나 냉철히 반성해보면, 80년대 학생운동은 권위적 도식적이었습니다. 커다란 결론을 정해놓고, 거기에 작은 것을 우겨 넣는 오류가 종종 발생했던 겁니다.

▽이〓386세대에게 아쉬움이 있다면 학문적 엄격성이 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 친일파 연구를 보면 ‘이런 사람들을 친일파에 넣는 것은 무리인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오랫 동안의 금기를 짧은 시간에 타파하려다 보니 그런 오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학문의 정치적인 목적도 중요하지만, 학문은 역시 엄밀한 연구에 기초해야 합니다. 문제의식의 과잉이었죠. 이러한 현상은 90년대 이후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민주주의에 기여한 역사학을 만들어나갔다는 점,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중시한 점 등은 평가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이〓그동안 식민주의 사학을 극복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친일파 정리가 안됐죠. 70년대 노동운동 민중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80년대 민중사관이 떠올랐지만, 정작 연구논문은 거의 없었습니다. 반성할 대목이죠.

▽안〓90년대에 그런 연구가 이뤄졌어야 했는데,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90년대초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386세대들이 사상적 공황을 겪고 방황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좌표를 잃어버린 거죠. 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이〓역사학은 시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학문입니다. 역사는 실천의 학문이어야 합니다. 80년 해직교수들 가운데 역사학자들이 가장 많았고, 옥고를 치른 386세대 중에도 역사학도가 상당수였다는 점을 보면, 한국 역사학이 그래도 세상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안〓서양에선 80년대 이후, 문화사 미시사 등 다양한 삶을 자기 목소리로 연구하는 역사학이 등장했어요. 이러한 경향을 참고해 한국사학계와 서양사학계의 연구교류가 활발해져야 합니다.

▽이〓4·19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역사학은 많이 도약했습니다. 그러나 완성이 아닙니다. 그동안은 여러 분야로 분화되어 발전했지만 이제는 그 연구성과를 종합해야 할 때입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시대에 걸맞는 사관, 혹은 자신의 사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정리〓이광표기자>kplee@donga.com

◇이만열교수 약력

△1957년 서울대 사학과 입학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한국근현대사 전공)

△숙명여대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한국사학사학회장

△저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한국 근대역사학의 이해’ ‘한국 기독교수용사 연구’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등

◇안효상씨 약력

△1983년 서울대 서양사학과 입학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중

△박종철출판사 대표

△논문 ‘버클리 자유언론운동’

△저서 ‘상식 밖의 세계사’, 번역서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 선집’ ‘생태제국주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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