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숫기가 없어 연기를 해보겠다는 생각보단 그저 학원비라도 내가 벌어야한다는 절박한 생존본능에 제일기획에 있던 분에게 연락을 드렸다.
첫 작품이 박순애 선배가 나오는 세제 CF였는데 나는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떼어내는 몸통 모습만 나왔다. 그래도 3일간 촬영에 25만원을 받았다. 당시로선 한달치 학원비를 내고도 남는 큰 돈이었다.
두 번째는 카세트 지면광고였다. 감독님이 첫 만남에 웃통을 벗어보라고 해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웃통 벗은 등짝만 나오는 사진이었다.
세 번째 광고에서도 얼굴은 안나왔다. 여자운동화 CF였는데 운동화를 신은 여자다리가 클로스업되고 나는 그 배경으로 색스폰을 불고있는 남자로 출연, 얼굴엔 포커스가 안잡혔다. 그래도 출연료는 50만원으로 뛰었다.
그때 누군가 방송사 탤런트만 되면 얼굴이 유명하지 않아도 광고 한편에 200만원은 받는다는 말을 해줬다. 그 말이 대학입시가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사수생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해 6월 불순한(?) 동기로 시험을 본 MBC 22기 탤런트 공채에 합격했고 6개월도 안돼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연기라곤 지나가는 행인으로 출연한 게 다인 나같은 생짜 신인에겐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첫 촬영장소가 서울여대였는데 난생 처음 대사가 있는 연기를, 그것도 몇백명의 여대생이 구경하는 가운데 하려니 덜덜 떨려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연출을 맡은 최윤석 PD의 입에서 캐스팅을 재고해야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다음날 세트촬영을 앞두고 방송국 연습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어느 부분에서 눈을 깜빡일지까지 동작 하나하나를 달달 외웠고 간신히 캐스팅 누락의 위기를 모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