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관 역사를 지킨다 6]죽음 무릅쓴 간언 송인수

  • 입력 2001년 4월 18일 18시 38분


을사사화의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인 1547년(명종 2) 9월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이 일어났다. 이는 을사사화의 가해자였던 윤원형 일파가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을사사화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청주에 내려와 있던 송인수(1499∼1547)는 이로 인해 사형당하고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수십 명이 귀양을 갔다.

의금부 도사가 송인수에게 사약을 가지고 오던 날은 마침 그의 생일이었다.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친척과 제자들은 생일을 축하하는 대신 그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목욕하고 의관을 단정히 한 송인수는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해 큰 글씨로 “하늘과 땅이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고 써서 사촌동생인 송기수에게 주고 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사약을 받았다.

“내가 화를 당했다고 해서 의기소침하지 말고 부지런히 독서하고 술과 여자를 경계하라. 내가 죽으면 상례는 검소하게 지내고, 예에 어긋나지 않게 하라. 부끄러움을 짊어지고 사는 것은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만 못하니라.”

49세의 나이로 죽을 때 송인수가 아들에게 당부한 이같은 삶은 그가 실천하며 살아온 삶이기도 했다.

송인수는 기묘사화 직후인 1521년(중종 16)에 문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1523년 언관인 홍문관 정자(正字·정9품)에 임명된 뒤 20여 년에 걸친 관직생활의 대부분을 언관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는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훈구와,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척신이 정국을 주도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선비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언론의 기능 역시 위축됐다. 권력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언관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송인수는 언관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언관활동을 시작한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1526년 그는 왕에게 “임금이 자신의 허물을 듣기를 싫어하면 끝까지 말을 다하는 언관을 죽이게 되고 결국 나라가 망한 예가 허다하다”며 간언(諫言)을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주장했다.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간언을 그치지 않은 언관과 지나친 간언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왕. 이것이 그가 바라던 언론의 모습이었고 실제 송인수는 그런 언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홍문관 정자로 있을 때 척신 김안로의 탄핵에 참여한 바 있던 송인수는 김안로가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1533년(중종 28) 그의 죄상을 열거하며 강력히 탄핵했다.

그러나 당시 요직에 있는 자는 모두 김안로 일파였고 그의 비위를 건드리면 죽기까지 했던 서슬 퍼렀던 시절이라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쫓겨나고 이어 경남 사천으로 유배됐다.

1537년 김안로의 실각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송인수는 성균대사성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성리학의 부흥에 힘쓰다 1541년 언관의 최고 수장인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됨으로써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러나 그 즈음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등 또 다른 척신세력이 대두하고 있었다. 대윤은 세자(인종)의 외숙인 윤임을 중심으로, 소윤은 경원대군(명종)의 외숙이며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일파였다.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왕위 계승 문제 등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송인수는 조정에서 이들 척신의 사치와 권력다툼으로 인해 사회의 공도(公道)가 무너짐을 여러 차례 비판하다가 다시 전라도 관찰사로 쫓겨 나갔다.

인종의 즉위로 대사헌에 복귀한 송인수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 대한 상소를 올리면서 언론과 언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동시에 척신에 대한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윤임이 형조참판에 임명되자 여러 날 동안 탄핵했다. 또한 윤원형이 품계를 뛰어넘어 공조참판에 임명되자 부당한 인사라며 두 달 동안 강력히 탄핵해 결국 물러나게 했다. 이 때 주위의 친구는 물론 매부인 성제원까지 윤원형의 세도를 두려워해 그만둘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재상의 반열에 둘 수 있단 말인가”하며 탄핵을 감행했다.

8개월만에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의 세상이 오자 비판의 대가로 송인수에게 찾아온 것은 삭탈관직에 이은 죽음이었다. ‘경박한 무리들의 영수’라는 죄목과 함께.

그러나 그와 같은 강직한 언관들의 희생과 죽음을 거름 삼아 언관제도는 암울했던 시기에도 무럭무럭 자라 마침내 사림(士林)의 세상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가 경연(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했던 말이 다시 들려온다.

“언관을 죽이는 것은 망해 가는 세상의 일로서 말할 가치조차 없다.”

고영진(광주대 교수·한국사)

◇송인수(宋麟壽·1499∼1547)

△1521년(중종 16)〓문과 합격.

△1523년〓홍문관 정자가 됨. 김안국에게 배움.

△1541년(중종 36)〓성균대사성이 됨. 성균관 학생들에게 소학과 성리서를 우선하도록 하고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다니게 함.

△1545년〓조광조의 관직 회복을 상소.

△1547년〓사사(賜死)됨.

△1570년〓청주에 그를 기리는 신암서원이 세워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