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한국' 창립]공동대표 3인 좌담회

  • 입력 2001년 4월 18일 23시 32분


《현 한국 사회를 위기상황으로 규정하고 좌우의 이념이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최근 창립된 지식인 모임 ‘비전@한국’이 큰 사회적 반향을 얻고 있다. ‘비전@한국’의 8인 공동대표 중 한 사람인 김석준(金錫俊·51)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50명으로 구성된 전남지역의 한 학술단체가 취지에 깊이 동감한다며 연대를 제의해왔다”고 밝혔다. 김 교수와 배규한(裵圭漢·50) 국민대 사회과학대학장, 박인제(朴仁濟·49) 변호사 등 공동대표 3명이 18일 본사에서 대담을 갖고 모임의 취지와 향후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김석준=이 모임이 태동된 것은 지난해 1월이었습니다. 당시 새 천년을 맞아 문명사적 질서의 변화에 대응해 우리 학자들도 새롭게 공부해보자는 생각에서 10여명이 모여 첫 연구모임을 가진 것이지요. 21세기에는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학문 분과간의 대화나 학문과 실무와의 대화가 더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매달 한번씩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창립대회를 갖게 된 것이지요.

▽박인제〓연구모임이 전문직에게까지 개방되면서 변호사인 저도 동참했습니다. 일상적 실무에 매몰된 나 같은 사람도 문명사적 전환기에 직면한 한국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붙들고 늘어지면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그룹을 갈망해왔지요.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장이 없는지 궁금해하던 차였습니다.

▽배규한〓우리 사회의 각종 제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육의 경우 학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정치제도의 불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가족 종교제도마저 흔들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박〓꼭 집어서 무엇이 위기인지, 위기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게 위기의식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정치가 사실상 공백 상태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경제위기는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있지요. 문화적인 정체성 위기도 심각합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뉴스와 국민이 일본의 상징인 벚꽃축제에 몰리는 뉴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오는 실정입니다.

▽김〓관료, 기업가, 근로자 모두 열심히 뛰었는데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모두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처음 외환 위기가 닥쳤을 때는 국민이 똘똘 뭉쳐 정부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불신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원인은 정부가 택한 각종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들이 국민 구성원들의 치열한 논쟁과 합의를 거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박〓의약분업이 실패한 데는 우리 사회의 지적(知的) 역량이 생각보다 낮은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든 지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결집한 결과였는지는 의문입니다. 몇달 전에 문제점으로 제기됐던 것들이 당장 현실로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두뇌집단의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한국 사회는 학습능력이 결여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지식이 축적될 수 있는 기회가 단절됐지요. 청와대의 서류마저도 다음 정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니까요. 개발독재 체제에서는 나쁜 의미에서라도 사회적 조정 메커니즘이 나름대로 있었는데 민주화 과정에서 이것이 와해됐습니다. 이제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기존의 인식체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틀이 만들어져야 난국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우리 사회의 리더십입니다. 한국의 나이많은 정치가들이 유연한 리더십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이들과 우리 사회 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전쟁 이후 세대들간의 원활한 의사소통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우리 사회에 오늘날 ‘침묵하는 다수’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극단의 목소리만 점점 더 높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공권력의 대우자동차 노조 과잉진압을 보면서 공권력마저 극단화 혹은 양극화 추세에 합류하고 있구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됐지요.

▽배〓공부에 매진해야 할 학자들이 이번에 지식인모임을 만들자고 나선 것도 양극화를 막아보자는 절박한 심정에서입니다.

▽박〓지식인들이 이런 모임에 나서는 모습이 꼭 좋게만 비칠지 모르겠습니다. 지식인의 사회참여가 부정적으로 비치는 것은 지식인 자체의 문제도 없지 않지만 정치권 공직사회의 폐쇄성도 큰 원인입니다. 그래도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김〓앞으로 우리가 내리는 처방이 얼마나 현실적합성을 갖는지 책임감도 느낍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모여 같이 토론하고 논의를 하다 보면 서로 모르는 다른 분야에 대해 배울 것이고, 관료나 시민단체 간부들을 초청해 얘기를 듣다 보면 현실에 대해서도 배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모임을 시작한 한 가지 이유입니다.

▽배〓한국사회의 이념적 고정관념이 워낙 강해 우리 모임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과거의 틀로 예단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우리 모임의 목적은 바로 이런 편견을 깨는 데 있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려는 지식인들의 모임 정도로 이해해줬으면 합니다. 특히 우리 모임은 회원들의 회비로만 운영될 것입니다.

▽김〓다음달 공식출범할 예정이기 때문에 아직 모임의 골격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뜻을 같이 하는 분 가운데 좋은 분을 공동대표와 고문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단일지도체제가 아니라 민주적인 다두체제라고나 할까요. 공동대표도 많고 고문도 많으며 분과위원장도 많은 조직으로 운영해 나가겠습니다.

▽박〓우리 모임은 거대 담론을 피하고 실용적인 해법을 찾는 실사구시적인 것이 기본이 돼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역시 사람의 문제이지요. 개인의 창의나 자유를 존중하는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과의 공존, 북한과의 공존, 세계와의 공존,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김〓20세기 학문은 각 분과 중심이어서 종합병원으로서의 성격이 약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자기 목소리를 너무 많이 내면 도리어 문제를 그르칠 수 있습니다. 모임 내에서 30여 개에 이르는 각 분과위원회가 기본적인 작업을 하되 다른 분과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통합화 노력을 더 기울이려고 합니다. 교육문제를 예로 들면 경제학자 철학자 공학자들이 함께 해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정리〓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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