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쪽, 8900원/한·언
얼마 전 소설가 이제하 선생의 어느 글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50년대 말이던가 박목월 선생이 강의실에서 요즘 사람들 ‘사랑’이라는 말을 왜 그렇게 남발하는지 모르겠다. 그 대신 ‘생각’이라는 말을 써도 좋으련만… 그 비슷한 말을 하시던 일이 생각난다”고.
그 시대로부터 50년을 더 흐른 오늘날이니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남용되고 오용되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러나 이즈음 흐드러지게 핀 왕벚꽃 나무 밑을 걸어가고 있노라면 사랑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친다. 물론 엄밀한 의미 그대로의 ‘사랑’일 것이다.
‘I Love You, Ronnie’는 바로 그 사랑의 기록이다.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에게 쓴 편지들을 엮은 것. 그리고 그 엮음의 주체는 바로 낸시이다. 따라서 책 제목에서도 드러났듯이 이 책은 두 사람(로니는 레이건의 애칭임)의 애틋한 감정의 교류기다. 그리고 그 교류기의 코드는 사랑이다.
레이건의 편지만 전재했으면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한 거인의 일방적인 감정 토로가 되었을 터인데, 낸시의 적절한 정황 설명이 덧씌워져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뚜렷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먼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진솔하게 들여다보는 다소 관음적인 응시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혼 10년이 넘었던 시절 낸시를 향해 레이건은 이렇게 토로했다. “오늘이란 다만 ‘사이에 낀’ 하루일 뿐이오. 일년 전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사랑하는 365일 가운데 단 ‘하루’이며, 앞으로의 일년동안 이보다 더 사랑하게 될 365일 가운데 ‘하루’일 뿐이오.”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편지를 적어 건네는 이 남자의 변함 없는 열정으로 보자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나라에서도 단연 대통령 감이다.
다른 하나는 레이건 시대에 대해 단편적이긴 하지만 사적인 필터를 통해 돌아봄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가령 70년대 포드 대통령에게 공화당 후보 지명을 빼앗겨 대선에 출마할 수 없었던 뼈아픈 사연, 모두 8년 간 대통령 재임시의 영광과 백악관에서의 생활, 힝클리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었던 이야기, 퇴임 후 1994년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해 현재까지 투병 중인 생활사 등이 이 연서 읽기에 망외(望外)의 소득을 안겨준다.
물론 이 책에서 단연 압도해오는 것은 한 사내의 아내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다. 따라서 무릇 남성이여, 이 사내의 아내 사랑을 본받으시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내를 사랑한 사내에게는 그 대가로 행복이 주어진다. 일국의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들이지만 왜 고난과 인고의 시간이 없었겠는가? 그 고난 속에서도 편지지 위에 씌어진 글씨들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아내는 이미 행복해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전편에 걸쳐 행복한 두 사람의 모습이 오버랩되지만 내게는 레이건의 낸시에 대한 사랑 고백도 한 남성의 이기주의의 발현과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낸시는 이 사랑 고백을 듣고 나면 더욱 상대방을 사랑해주었으니까. 따라서 두 사람의 윈윈 전략식 연애의 방식이 부럽다고 느낄 수밖에.
성공한 사람들의 비망록 같아, 한가한 회고담이 나올 줄만 알고 펴들었던 책에서 한 사내의 강렬한 사랑의 말이 잔잔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연서의 내용이란 늘 낡은 언어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사족 하나, 한국 번역판은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당시의 제목 그대로이기는 하나 영문을 책제목으로 표기하고 있어 납득하기 어렵다.
정은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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