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허탈한 목진석 복기도 않고 퇴장

  • 입력 2001년 4월 25일 18시 41분


이긴 자나 진 자나 15초 정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대국장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보통 진 쪽이 먼저 말을 걸어 복기를 시작하지만 패자인 목진석 5단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유창혁 9단은 목 5단을 힐끗 쳐다보더니 후배의 기분을 눈치챘다는 듯 주섬주섬 바둑돌을 통 안에 집어넣었다. 목 5단도 바둑돌을 담았다. 그리곤 서로 꾸벅 인사를 하더니 자리를 뜬다.

옆에서 복기를 지켜보려던 사람들만 머쓱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23일 열린 명인전 본선 11국.장면도를 보자. 중앙에 거대한 흑(유 9단)의 세력이 백의 실리를 압도하고 있는 형세. 이제 백이 중앙 흑 세력을 지울 마지막 찬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어려운 형국이다. 목 5단은 가벼운 응수타진으로 백 1에 껴 붙였다. 내려 뻗어 차단할 것이냐, 아니면 물러설 것이냐를 물어본 것. 보통 때라면 흑이 어떤 식으로든 응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 9단은 훌쩍 손을 돌려 흑 2에 보강했다. 유 9단은 중앙 흑세를 완성시키기 위해 흑 2의 곳을 지키는 것이 ‘필수’라고 봤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백 1, 흑 2의 교환을 본 검토실의 최명훈 7단은 ‘쯧쯧’ 혀를 차면서 백 1 대신 ‘가’의 곳에 돌을 놓았다. 불리한 백으로선 좀 무리한 듯하지만 ‘가’까지 뛰어들어 승부를 걸어야 했다는 것. 결국 백 1은 검토실에서 ‘방심의 한 수’ ‘패기 부족의 한 수’ ‘앉아서 패배를 기다린 한 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후 진행에는 더 이상 변화가 없었다. 흑 11집 반 승.

패배에도 납득할 수 있는 패배가 있다.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다 상대의 기막힌 묘수로 인해 질 수도 있다. 또 다 이긴 바둑을 막판에 어처구니없는 착각으로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승부사로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건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졌을 때일 것이다. 목 5단이 반면 15집 이상 차이가 나는데도 돌을 던지지 않고 끝까지 둔 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했던 자신의 바둑에 대한 자책이었을 것이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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