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의 초상은 단색이다. 혁명에 헌신하는 강철같은 투사이거나 피에 굶주린 악마의 이미지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혁명가가 사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
투사의 이미지를 고수하려는 측에게, 혁명가의 인간적 고뇌는 덮어버려야 할 약점이다. 회의(懷疑)는 행동의 제약일 뿐이다. 악마의 이미지를 고집하는 측에게도, 고뇌하는 악마는 당치 않다. 악마는 주저함이 없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들을 모은 ‘자유로운 영혼, 로자 룩셈부르크’(예담·2001)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고정된 혁명가의 이미지를 보기 좋게 깨부순다. 어려운 시대 힘든 상황 속에서 인간으로 남아 있고자 고뇌했던, 강하면서도 약하고 섬세한 한 영혼의 울림이 있을 뿐이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길거리에서 개구리 합창대회를 열다 잠을 설친 이웃에게 혼이 나고, 자신의 감방에 날아드는 굴뚝새와 개똥지빠귀에게 줄 해바라기 씨앗을 넣어주도록 친지에게 부탁하는 소녀 같은 이 중년 여성에게서 피에 굶주린 ‘빨갱이’ 로자의 이미지를 찾는다면 헛수고다.
“혁명 전 프랑스 귀족문화의 진수와 쇠락의 미가 살짝 더해져 고도의 세련미로 형상화된 그림”을 완상(玩賞)하고 괴테, 쉴러, 아나톨 프랑스, 로망 롤랑, 모차르트, 베토벤, 티티아노, 렘브란트 등을 즐겼던 로자의 예술취향에는 현실 사회주의의 공식 미학인 ‘프롤레트쿨트’ 이론이 자리할 여지는 없다. 의식주의 일상생활에서도 로자의 개인적 취향은 아주 까다롭고 고급이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로자가 외곬의 사회주의 혁명투사라는 고정관념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편지에서 드러나는 그의 내면은 다소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이지만, 내가 인간으로서의 로자 뿐만 아니라 혁명가로서의 로자를 신뢰하는 것은 바로 이 모순 때문이다. 실존을 껴안은 혁명가의 진솔한 초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그리고 독일의 ‘조센징’인 폴란드인으로서 사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인간으로 남기 위해 고투한 그의 삶은 척박한 단순논리로 인간과 사회를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삶에 대한 인간의 성숙한 태도에는 늘 여운이 있다. 혁명의 최전선에서 인간으로 남아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실하게 느끼는 자의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혁명가는 사물이 아니다. 역사의 대상이 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인간이다.임지현(한양대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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