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공대 1학년 교양과목 ‘수학 및 연습’ 강의실. 몇 차례 반복 설명하던 강사 최모씨(30)가 설명을 멈추고 물었다. 수강생 50명 가운데 12명이 손을 들었다. 최씨는 “기초적인 문제 2개를 1시간 이상 설명해야 하니…”라고 한탄했다.
대다수의 학생은 “진도가 빨라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불만이었다. 반면 복학생 이모씨(26)는 “예전보다 훨씬 쉬운데 신입생들이 어렵다고 해 뜻밖이다”고 말했다.
3월 초 서울대 ‘기초한문’ 첫 수업시간. 강사 김모씨(34)가 한 신입생에게 “1에서 10까지 한자로 써 보라”고 했다. 칠판에 一(1)에서 五(5)까지 쓰던 학생이 六(6)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몇 차례 썼다 지웠다 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이 학생은 “한자를 자주 쓴 적도 없고 써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고 대답했다. 김씨가 출강하는 홍익대와 인하대의 사정도 마찬가지. 대학생 저학력 시대. 대학가에 흔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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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무서워〓서울대 오세정(吳世正·물리학) 교수는 지난해 2학년 ‘물리역학’ 시험지를 채점하다 깜짝 놀랐다. 학생들의 ‘저학력’을 감안해 평균 40∼50점으로 잡고 쉽게 출제했지만 30점대에 못 미친 것.
오 교수는 학생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고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지만 기본 개념과 원리를 몰라 강의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학생 학력저하▼ |
- 上 "대학강의실 맞나요" |
지난해 4월 서울대에서 미적분학을 듣는 33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수업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응답자가 102명.
또 고교와 대학에서 배우는 내용에 대해 ‘전혀 연결이 안 돼 곤혹스럽다’는 응답자가 92명이나 됐다.
다른 대학은 더 심각하다. 충남 H대에서 수학 교양과목 첫 시간에 ‘sin60은?’ ‘X²을 미분하라’ 등 고교를 졸업하면 알 수 있는 문제를 냈지만 평균은 겨우 30점. 인천 I대에선 지난해 수학과 편입생 7, 8명에게 ‘sinⅩ’의 미분방법을 물었으나 대답하는 학생이 1명도 없었다.
연세대 자연과학부 장건수(張健洙) 교수는 “몇 년째 수학실력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데 교수들 대부분이 공감한다”면서 “기초학력이 워낙 낮아 수학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 분야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영어도 마찬가지〓서울대 인문대 98학번 한 학생은 ‘F’학점을 계속 맞다 결국 자퇴했다. 이 학생은 교수에게 “영어로 된 책을 읽기가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영어 교육이 말하기와 듣기 중심으로 바뀌면서 ‘영어 벙어리’는 크게 줄었지만 학문적 성찰이 요구되는 원서 ‘독해력’은 크게 떨어진 것.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李在烈) 교수는 “대학원생들이 과거 학부생들이 읽었던 영어 원서를 해독하지 못해 쩔쩔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강의실에서 외국어 원서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宋基豪) 교수는 “국사학과 입학지원서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남벌(이현세 만화)’ 등 만화책을 적는 학생이 많았다”면서 “책을 읽지 않으면서 인문학을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느냐”고 걱정했다.
▽낮아지는 교재 수준〓대학 교재도 ‘내리막길’. 과거 2학년이 배우던 것을 3학년이, 3학년이 배우던 것을 4학년이, 4학년이 배우던 것을 대학원생이 배우는 식이다.
경북대는 2년 전부터 교양물리 교재에서 미적분의 개념을 뺐다. 물리학과 이형락(李亨洛) 교수는 “물리의 기본인 ‘벡터’와 ‘스칼라’의 양도 구별하지 못하고 미적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수학까지 함께 가르쳐야 할 때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숙명여대도 4년 전부터 미적분이 빠진 물리 교재를 사용하면서 기본 개념 위주로 강의하고 있다. 서울대는 3년 전부터 고급 미적분학을 뺀 ‘미적분학’ 교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올해 개설한 ‘기초미적분학’ 교재에 고교 수준의 내용을 담았다.
영어 교재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대는 3년 전부터 독해 문장이 줄고 고급 어휘 등이 빠진 신입생 교양영어 교재를 채택했다. 예전의 교양영어 교재는 고급영어반에서 활용되고 있다. 교재의 수준을 낮추지 않으면 학생들이 아예 외면해 폐강해야 할 지경이라고 교수들은 하소연하고 있다.
▽우열반 열풍〓과거 고교에서나 있었던 우열반이 대학에 흔하다. 성균관대 물리학과는 교양 일반물리학 강의를 A·B·C 3개 반으로 나눠 실력에 따라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수학과도 올해부터 미적분학 강의를 학력 수준에 따라 3개 반으로 나눴다. 과기원 수학과 한상근(韓相根) 교수는 “학생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고 전공별로 요구하는 강의 수준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학원도 흔들린다〓지난해 서울대 물리학과는 대학원 모집 정원 40명을 채우지 못하고 30명만 뽑았다. 지원자도 줄었을 뿐만 아니라 기본 소양이 의심스러운 지원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연세대 성균관대 포항공대의 대학원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성균관대 물리학과 홍승우(洪承宇) 교수는 “대학원의 학력 저하 현상은 기초과학을 포함한 제반 학문 연구의 뿌리를 흔드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학력저하와 국가경쟁력〓금호그룹은 지난해 면접 응시자 500여명에게 한자능력시험을 치렀다. 평균 성적은 50점 이하로 ‘충격적’. 금호그룹 관계자는 “직원들은 대개 80점 이상을 받는다”면서 “대학생의 학력 저하 현상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학생생활연구소 신희천(申熙天) 상담연구원은 “90년대 중반부터 ‘학업 및 진로 문제’로 상담하는 학생들이 부쩍 늘었으며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경달·박용기자>d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