幼―어릴 유 序―차례 서 垂―드리울 수
縱―세로 종 叱―꾸짖을 질 縮―줄일 축
儒家(유가)가 강조한 것 중에는 훌륭한 점도 많지만 批判(비판)받아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長幼有序(장유유서)로 대표되는 垂直的(수직적)인 倫理觀(윤리관)이다. 사람을 나이에 따라 일렬 縱隊(종대)로 세워놓고는 무조건 服從(복종)을 강요했다. 자연히 나이가 적거나 어린 아이들은 末席(말석)조차 차지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군소리 없이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아이로 취급되었다. 혹 어른 말씀에 꼬박꼬박 대꾸라도 하면 대뜸 ‘이 놈이!’라고 야단 맞기 일쑤다. ‘어디 감히 어른 말씀에…’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西洋과 판이하다. 保護와 關心의 대상이라기보다는 敎育과 叱責(질책)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漢字를 보아도 잘 드러난다.
兒는 臼(G·숨구멍 신)과 ¤(人)의 결합이다. 지금은 臼을 ‘절구 구’로 읽지만 아기의 머리가 아직 봉합되지 않은 상태도 뜻했다. 그래서 벌어져 있다. 갓난아기를 보면 숨쉴 때마다 머리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은 서 있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그린 것으로 人, ¤과 함께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까 兒는 아직 정수리가 붙지 않은(臼) 사람(¤), 곧 ‘어린 아이’를 뜻한다.
한편 童은 重과 辛(신·罪)의 결합, 곧 ‘중죄를 짓고 관직을 박탈당하여 노예가 된 남자’를 뜻했다. 그것은 아직 미숙과 경솔 때문이므로 덩달아 ‘미성년’ ‘아이’까지도 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兒童이라면 적어도 옛날에는 그저 ‘미숙하다’는 인식만 있어 ‘다스려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여기에다 長幼有序까지 한몫 하게 되었으니 어린이의 존재가 輕視(경시)되었던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無限한 可能性과 固有의 人格이 있다. 또한 그들은 장차 이 나라의 主人이 될 사람들이다. 이제 어른의 縮小版(축소판), 所有物 쯤으로 여겼던 낡은 思考(사고)는 떨쳐버리고 그들의 잠재성을 일깨워주고 未來를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들 세상’이라고 외치기 전에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5일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의 중요성은 새삼 强調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만큼 일년 365일이 어린이날이라는 생각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몸가짐도 중요하다. 어린이의 스승은 어른들이니까.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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