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느 곳을 가도 보이는 건 시멘트와 아스팔트 포장 도로뿐. 흙탕물도 안생기고 먼지도 덜 날려 편하긴 하지만 잿빛이 주는 삭막함을 씻어버릴 순 없는 노릇. 갈수록 흙이 그리워지는 이때 맨발로 산길을 활보할 수 있는 백운산 자영휴양림 황톳길을 직접 체험해 보았다.
사람의 신체중 가장 불쌍한 부위는? 발이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부위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발이 가장 밑바닥에서 ‘박박’ 기고 있지 않은가. ‘발의 수난시대’를 생각하면 뭐니뭐니 해도 ‘전족’이라는 무식한(?) 중국 풍습이 떠오른다. 전족이란 알다시피 여자 아이가 2~3세가 되면 엄지발가락만 남기고 발을 긴 천으로 꽁꽁 동여매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풍습이 생기게 된 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도망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는 얘기가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걸 보면, 발이 얼마나 학대를 받아왔는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아무튼 중국에서는 인체의 다른 어떤 부위보다 발을 치부로 여겨 그 기나긴 역사에서 발을 노출시키는 관용을 베푼 때가 한 시대도 없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양말을 신은 채로 수영을 했다고 하니 말해 무엇하랴.
그런 중국에 비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발은 호강을 한 셈이다. 세종대왕은 일찍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 버선 속에 날콩을 한움큼 넣어 발바닥 지압 효과로 건강을 유지했다는 얘기가 있다. 또 갓 결혼한 새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오는데 이 또한 혈액순환을 돕는 방법의 하나로, 생식기 부위의 반사대를 자극하여 아들 딸 잘 낳고 잘 살라는 뜻이었다니 중국과 달리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셈이다.
서두부터 뜬금없이 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번 여행길이 발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각 지역마다 자연휴양림이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여행 아이템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조용한 산 속에 있고, 근사한 통나무 집이 있고, 삼림욕을 만끽할 수 있는 숲속 산책길이 있고, 계곡물이 있고…. 저마다 나름대로 특성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자의 눈길을 끈 건 산책로를 맨발로 다닐 수 있게 한 백운산 자연휴양림의 ‘맨발 체험 황톳길’이다. 산길을 맨발로 누빈다니…. 어른이라면 어린 시절, 흙바닥에서 뛰놀던 추억을 떠올리며 동심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고, 시멘트 바닥만 보고 자라는 요즘 아이들은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어 그야말로 ‘따봉’인 듯싶었다.
더구나 최근 들어서는 ‘발은 제 2의 심장’이니 ‘발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을 알 수 있다’ 뭐다 해서 발의 건강을 강조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26개의 뼈와 1백여 개의 근육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발은 매일 32t(사람 몸무게가 왜 32t이냐고 따지지 마세요. 발이 단독으로 받는 사람의 몸무게 느낌이니까요)의 하중을 견뎌가며 평생 동안 지구를 4바퀴 반이나 걸을 수 있게 해주는 ‘막강 파워’를 자랑한다. 그런 발이 받는 대접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가 요즘들어 관심을 끌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발을 괴롭히는 가장 고약한 존재는 바로 ‘잘못된 신발’. 이것과 발의 만남은 두말할 것 없이 ‘잘못된 만남’이다. 흔히 앞이 뾰쪽한 구두(요즘 유행하는 아라비안 나이트 구두도 마찬가지)와 하이힐 구두의 고약성은 익히 알고 있지만 통굽 구두와 발가락 공간이 유난히 넓은 뽀빠이 구두도 적신호 대상.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발이 환영하는 신발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번 걷고 두번 걷고 자꾸만 걷고 싶네…"◇
이런 상황에서 잠시나마 신발을 훌훌 벗어버리고 맨발로 산길을 활보할 수 있다니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더구나 공해에 찌든 도심을 벗어나 싱그러운 공기가 솔솔 떠다니는 산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으랴.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백운산 자연휴양림에서 맨발 산책의 신선함을 직접 느껴 보았다.
전남 광양시청에서 관리하고 있는 백운산 자연휴양림의 황톳길은 99년에 조성되었다. 1.2km 길이에 폭은 3m 정도. 두 사람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나란히 걷기에 딱 알맞은 길이다. 겨울에는 발이 시려 웬만한 ‘객기’ 아니고는 맨발 체험을 할 수 없지만 4월부터 10월까지는 충분히 맨발로 걸을 수 있다.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아 이곳을 찾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지만 차츰차츰 입소문이 퍼지면서 주말에는 사람들이 제법 찾아온다고.
맨발로 걷는 길이니 만큼 아무래도 길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게 마련. 광양시청에서는 해마다 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흙을 다져 놓고 또 수시로 길을 쓸어주고 있다. 그렇게 다져진 황톳길은 무엇보다 진입로 입구 풍경이 근사했다. 늘씬한 키에 한치의 굽어짐 없이 하늘로 치솟은 ‘쭉쭉빵빵’한 소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이 마치 위엄있는 근위병들이 도열해 호위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발을 가둬두고 있던 모든 것들을 벗고 흙을 밟는 순간의 느낌은 뭐랄까? ‘싸~아’한 기운이 마치 수건에 싼 얼음덩이를 펄펄 끓는 이마에 대는 느낌이다. 그만큼 상쾌했다. 맨발이 느끼는 흙길은 비교적 고왔다. 간간이 아기들의 새끼 손톱만한 작은 돌멩이와 바람에 떨어진 솔이파리들이 있어 ‘따끔한 맛’도 보긴 했지만 오히려 지압효과가 커 도움이 되는 듯했다.
발 지압은 부위마다 각기 효과가 다르다고 한다. 발가락 부위는 머리의 상응 부위로 건망증, 치매, 중풍예방에 도움이 되고 발바닥은 어깨결림, 발뒤꿈치는 생리불순, 생리통 해소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게다가 무좀까지 예방해 준다니 발지압이 발에는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틈만 나면 맨발 산책을 하고 있는 광양시청 산림과의 김재복씨는 “비가 오면 더 좋다”며 ‘비온 뒤의 산책 예찬론’을 펼친다. “물기가 촉촉하게 스며든 뒤의 땅을 밟는 기분이 아주 그만이죠. 그래서 비오고 난 다음날만 골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요. 황톳길 맛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죠. 또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운동삼아 황톳길을 걸을 때가 가장 느낌이 좋아요. 그리고 이 코스는 연인들끼리 오면 아주 좋은데….” 라며 같은 값이면 ‘플러스 알파’ 효과를 볼 수 있는 요령을 일러준다.
출발해서 앞만 보고 걸으면 대략 20분, 옆사람과 얘기를 나누며 슬슬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 그러나 중간중간 간이 테이블이 있어 걷다가 쉬엄쉬엄 의자에 앉아 숲속 풍경을 감상하는 맛도 느껴볼 만하다. 그렇게 한바퀴 돌아나와 입구에 배치된 수도꼭지를 틀어 산물로 발을 씻다보면 어느새 또 한번 걸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휴양림 개장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겨울엔 6시). 이곳의 숙박시설을 이용할 경우, 김재복씨가 권하는 새벽의 황톳길 맛을 볼 수 있다. 통나무로 지은 ‘숲속의 집’은 원룸 스타일로 직접 취사를 할 수 있도록 주방시설도 마련돼 있다. 이용료는 3만원으로 시설비 투자를 감안해보면 손해지만 광양시에서 서비스 차원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단 여섯 동밖에 없어 평일에는 예약 없이도 그런대로 이용할 수 있지만 주말에는 ‘예약 필수’.
어느새 ‘봄날은 가고’ 더위가 슬슬 찾아오려는 요즘, 자녀들과 함께 혹은 부부만 단 둘이 오붓하게 백운산 휴양림에서 ‘맨발 데이트’를 체험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백운산 자연휴양림 문의 061-763-8615
<글·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사진·박창민(프리랜서)>
(여성동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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