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강영희의 도전 인터뷰-'마이너리그'작가 은희경

  • 입력 2001년 5월 7일 18시 46분


좌-강영희씨, 우-은희경씨
좌-강영희씨, 우-은희경씨
은희경씨의 신작 소설 ‘마이너리그’(창작과비평사)는 세태 비판소설인가,아니면 통속 대중소설인가? 이에 대한 평가가 극단으로 엇갈리고 있다. 올해 이만큼 논쟁적인 작품도 없었다. 문화평론가 강영희씨가 은씨를 전격 인터뷰했다. <편집자>

◇"살다보면 다 마이너 인생인걸 …"

은희경. 소설책의 앞날개나 신문의 광고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는, 늘 어딘가를 응시한 채 야무지게 웃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바깥쪽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에 나의 모든 원칙과 규범과 척도가 들어 있다. 그것들은 내 안에서 생성됐다가 내 안에서 소멸한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나는 즐겁다. 나홀로 기껍다. 강도높은 자의식의 탄력, 매혹의 비밀은 이쯤에 있다.

그녀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랄 수 있는 [새의 선물](1995)의 주제도 이 언저리에 있다. 유쾌하게 의표를 찌르는 문체의 급류에 올라탄 채, 자의식에 굵은 선을 거듭해서 덧칠하는 그녀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인생에 대한 수많은 경구까지 덧붙은 터라 소일꺼리 치고는 괜찮은 편이다.

소일꺼리-이것은 문학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사람에게는 모욕처럼 느껴질 말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 단어를 쓰는 까닭은, 그녀의 독자가 10만 명쯤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문학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이 10만 명일 리는 없을 터이니, 전자를 5천 명으로 본다면 나머지 대다수가 그녀의 소설을 소일꺼리로 읽는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은 문학을 소일꺼리로 읽으면서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오랜 습성이 있다. 드라마가 현실과 혼동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게 문학은 계몽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은 유쾌한 '소일꺼리'로서 받아들여질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소설가가 '농담'을 던진다고 해도 독자는 킥킥거리면서도 그것을 어느새 '진담'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그녀 소설의 주 독자층이라고 그녀 자신이 지목한 30대의 전문직 여성들이, 대체로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그녀의 소설 속에서 자신의 역할 모델을 발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강도높은 자의식의 탄력.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적으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맞대결을 통해 자폐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나르시시즘의 표정을 하고 있다.

그녀의 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를 역사적인 시야에서 바라보면 어둠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 극도로 벼려진 사회의식의 뒤안에서 상대적으로 자의식이 설 자리가 없던 지난 시대의 내면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지난 시대가 남기고 간 정서는 이율배반적이다. 한쪽은 숨막히게 그리운 향수이며, 다른 한쪽은 고개를 돌리고 싶은 상실감과 환멸이다. 그리고 바로 후자와 맞닥뜨리는 지점에서 오늘날 그녀가 발신하는 자의식의 코드가 상대적으로 빛을 발한다.

이렇게 보면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작품은 분명 시류적(時流的)이다. 게다가 그녀가 소설 속에서 말하는 것은 지난 시대의 경향인 낭만과 미소, 진정성, 리얼리티와 정확하게 반대 지점에 있는 환멸과 냉소, 농담, 역설(irony)인데, 이것은 말하자면 오늘날의 경향이라고 분명히 집어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녀는 말한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지금 대중이 원하는 것하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어딘가.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강요받기 싫어하고 경직된 걸 풀고 싶어하고 억압돼 왔던 것들을 벗어나고 싶어하는데, 최민수 시리즈나 졸라맨 같은 거 보면 그렇잖아요. 그런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사람들이 제 책을 읽는 게 아닌가 해요."

그녀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분노도 별로 없고 적의도 없다". 하지만 그녀가 불편하고 마땅찮아 하는 경우가 딱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농담과 역설을 모르고 너무 진지한 것"이다. 그녀가 독자에게 던지는 유일한 주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역설로서 이해하면 그 속에 진의가 스미게 마련인데,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도대체 엉망진창이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그녀가 펴낸 소설[마이너리그]는 세계관이나 화법, 문체, 그리고 예의 시류성(時流性)에 이르기까지 그녀 소설의 여러 특징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경우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시류성이다.

"이거 나오기 전까지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는데, 독자들의 대중성을 의식하고 마음에 들게 쓰고 그런 혐의가 있는 터에 이걸 딱 쓰니까, 마이너리그라는 제목 가지고 상당히 의심들을 하시고, 내가 전략을 가지고 한 것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어느 선생님이 소설을 받아보시더니 역시 은희경씨 제목을 보면 시류를 읽을 줄 알아,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데 굉장히 마음에 상처가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창작노트'까지 보여주면서 "이걸 보여주면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애서, 그냥 왜소해져가는 인생이라고 써 있더라구요. 거기서 톤을 남자의 인생, 마이너리티의 그늘로 가고, 세대론적인 거를 좀 쓴 거예요."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렇게 궁색한 방식으로 자신을 변명하려는 걸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번의 시류성(?)이 지난날의 시류성과는 대척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우리시대의 평등주의적 민주화 추세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왜 하필이면 한 시대를 상징하는 기호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 "58년 개띠 남성들"이 주인공이냐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왜냐하면 내 세대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세대니깐요. 학교를 일년 일찍 들어가서 58년하고 같이 학교를 다녔으니까 쓰기가 제일 쉽죠. 그런데 이야기를 사실감있게 쓰다 보니까...이 말은 나 라는 세대가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게 되겠죠."

그녀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하지만, 사회소설이나 세태소설을 쓸 마음은 아니었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다 마이너라는 건데, 그냥 인생을 살다보면 이렇게 쓸쓸하기도 하고 통렬하기도 하고, 여름이 지나간 뒤에 스러지는 가을빛 같은 기분으로 마이너리티 라는 얘기를 한 거지, 마이너와 메이저를 갈라갖고 메이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불평등, 분노, 사회구조의 모순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근데 우리시대에 마이너로 살아야 되는 사람들의 비애라고 다들 읽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녀의 관심은 변함없이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탐구에 있었으며, 사회소설을 쓸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이너라는 말에는 메이저라는 말이 괄호 속에라도 없을 수 없는 법. 그렇다면 그녀가 주장하는 메이저란 무언가. 그것을 그녀는 다른 소설에서 인생의 적자(嫡子)라고 말한 바 있다. 자기 방어를 위한 편견이 발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에 대해 심각한 자의식이 없는 거죠." 물론 그녀는 "그런 사람들이 훌륭한 인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렇다면 알 만하다. 환멸과 냉소, 농담, 역설로 요약되는 그녀의 인생관을 의인화한 것이 바로 마이너리티인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어긋남이 시작된다. 58년 개띠 남성들의 세대론에 존재론의 프리즘을 들이대는 것은, 그녀의 농담에 진지함의 잣대를 들어대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에서 넌센스적인 배합이 된다. 따라서 그녀의 소설에서 관성적으로 존재론적인 자의식을 기대하는 시선에게는 대단한 시류성으로 비치는 것이며, 반대로 그녀의 새로운 변신(?)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시선에게는 어처구니없는 모욕으로 비춰진다. 왜냐하면 소설은 저 7, 80년대의 격류에 대해서조차 변함없이 굳건하게 '모르쇠'의 자폐적인 포즈를 취하면서 지나치게 '쎈' 풍자의 화살을 거꾸로 주인공들에게 돌려 그 시대의 전형으로 내세워진 그들을 바보로 만들어놓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발랄한 농쪼의 입심에 기대어 환멸과 냉소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꾸로 농담이 진지함에 대해 던지는 모욕으로 비칠 소지가 있다.

그녀는 말한다. "뭔가 삶에 방향성이 있고 선이나 가치에 대해 추구점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이 하나도 추구할 게 없는 다초점 인생이 거부감이 들겠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인생은 진지하면서도 농스러운 것이며, 가치 없으면서도 가치 있는 것이고, 통속적인 것이면서 또한 통속을 넘어선 것이 아닐까. 그것을 향해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한 시대를 단일한 화두의 꼬치로 꿰어낼려고 하는 데서, 혹은 꿰어낼 수밖에 없는 시대의 무게에서 모든 인간심리의 불협화음과 지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이란 보통의 사고와는 다른, 안쓰는 근육을 쓰는 것과 같은 다른 식의 사고를 시켜주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맞따나, 소설의 주제가 시대의 화두에서 놓여나는, 소설의 메시지가 더이상 시류적인 관심과 알몸뚱이로 맞부닥치지 않을 그런 성숙한 사회는 언제나 맞이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되면 그녀는 10만명의 독자를 잃고 5천명의 독자로 만족해야 할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강영희(문학평론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