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데이트 꿈도 못꿔요"
▽더 무거워지는 족쇄〓“다른 여자한테 한번만 전화가 와도 3개의 항목에 ‘기록’이 남습니다. 모조리 ‘삭제’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꼬투리 잡히기 쉽죠.”
회사원 박모씨(28)의 고민이다. 애인이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통화기록 조회’ 항목을 누르면 최근 수신번호, 그 중에서도 자신이 받은 번호와 안 받은 번호를 빠짐없이 알 수 있는 ‘발신자 추적서비스’를 신청한 탓. 데이트를 하기 전엔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문자메시지, 통화기록 등을 남김없이 지워야 한다.
서로 어디 있는지 모르면 불안하다는 이유로 신청한 ‘위치 확인 추적 서비스’도 애정이 식을 경우 애물단지로 변모한다. 상대방의 구체적인 현재 위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몰래 데이트’는 꿈도 못 꾼다.
저녁 늦은 시간 유흥업소가 밀집한 ‘서울 강남구 역삼동 200-14’식의 주소가 찍히면 왜 그 위치에 있는지를 여자 친구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공중전화를 이용하더라도 지역번호가 담긴 고유번호가 찍히므로 지방이건 서울이건 어디에서 전화를 하는지 금세 파악된다.
수사기관과 카드회사 등에서는 범인의 위치 추적과 빚 독촉을 위한 전화는 상대방이 아예 받질 않는다며 난감해 하고 있다.
벨소리-멜로디도 개성있게
▽적극적인 의사 표시〓전화를 걸어온 사람의 신분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어 그에 따라 ‘준비된 응대’가 가능해졌다. 안진용씨(23·서강대 신방과 3년)는 “원하지 않는 모임이 있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의 전화번호가 찍히면 처음부터 아픈 척하거나 우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고 말했다.
매니지먼트사 ‘싸이더스’의 이원형 이사는 “요즘 유명 연예인 체육인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휴대전화 번호를 누를 때 ‘*23#’을 넣느냐 안 넣느냐로 알아본다”고 귀띔한다. 이 경우 전화번호가 상대방 휴대전화에 뜨지 않으므로 번호노출을 막으려는 유명인들이 많이 애용한다.
벨소리는 멜로디로, 멜로디는 음악의 ‘원음’으로 발전했다. 웬만한 카세트테이프 정도의 음질이어서 ‘오케스트라 화음’으로 불린다.
‘국민체조 주제가’를 입력해 놓은 김희원씨(27·미래에셋)는 “요즘 웬만한 멜로디에는 다들 만성이 된 것 같다. 대인 업무가 많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마음의 여유’를 줄 수 있도록 휴대전화 벨소리를 설정한다”고 말한다.
‘미래소년 코난’ 등의 복고풍 음악도 잠시나마 주위 사람들을 추억에 잠기게 해 인기가 높다.
문자 메시지로 상대 떠보기
▽‘틈새 통신’의 정착〓문자메시지는 ‘쪽지 편지’기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약속을 일방적으로 깰 때 △직접 대놓고 이야기하긴 싫을 때(혹은 이성간 이별을 고할 때)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야 할 때 등에 두루 이용되는 ‘틈새 통신’ 수단으로 자리를 굳혔다.
소나리씨(20·숙명여대 경영학과 3년)는 “단적인 예로 요즘은 미팅 후 곧바로 전화로 애프터 신청을 하면 실례다.
문자로 ‘잘 들어갔어?’라고 운을 한 번 뗀 뒤 상대방의 회답이 있을 경우에만 전화를 하는 것이 예의”라고 말했다. 마치 ‘머피의 법칙’처럼 남녀 관계의 시작단계에서 ‘문자 사고’(메시지가 배달되지 않고 공중에 뜨는 것)가 발생하는 경우는 피차 ‘인연이 없는 사이’로 받아들인다.
◇日'NTT도코모'社 서비스-받기 싫은 전화 30개까지 지정
일본 최대의 이동통신 시스템 ‘i모드’를 거느리고 있는 ‘NTT도코모’사의 서비스는 한국보다 조금 업그레이드 돼 있어 향후 국내 이동통신의 유행 패턴을 짐작할 수 있다.
스토커 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발신자표시서비스가 시작돼 이미 90년대 초부터 상용화됐다.
운전 중에 ‘운전하고 있으니 전화 못 받습니다’라는 안내를 내보내 주는 ‘드라이브 모드’ 기능은 한 달에 400엔(약 4400원)정도만 더 내면 돼 가입자가 많다.
자신의 현재 위치와 주변의 음식점, 숙박 편의시설, 기관 단체의 연락처와 위치 등 20만건에 달하는 상세 정보가 휴대폰 액정에 컴퓨터 화면처럼 자세히 표시되는 ‘내비게이션’ 시스템도 전화번호 안내와 지도검색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받기 싫은 전화의 경우 번호를 지정하면 최대 30개까지 수신이 금지된다.
일본문화원의 다카네 가즈마사(高根和正·34) 사무관은 “일본의 최신형 단말기들은 대부분 ‘스크롤바’가 달려 있어 한 화면에 20여개씩 전화번호 검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