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 다시보기]불우한 천재서 '욕망의 순례자'로

  • 입력 2001년 5월 20일 18시 59분


○…여성편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카사노바(본명 지아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1725∼1798).

카사노바하면 우리는 성과 쾌락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이러한 이미지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카사노바는 분명 수많은 여인의 체취를 탐닉한 감각주의자였지만 그저 단순한 바람둥이는 결코 아니었다.

카사노바의 삶의 색깔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18세에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였으며, 자유와 평등의 철학을 추구했던 계몽주의자였고, 프랑스 혁명을 앞둔 격변기에 유럽을 누비면서 자유와 평등을 전파한 메신저였다.

또한 40여권의 저서를 남긴 박식하고 위대한 저술가였으며, 예술과 풍류를 즐긴 낭만주의자였고, 탁월한 벤처사업가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고백한 것처럼, 카사노바의 인생 여정을 관통한 것은 자유였다.

▼글 싣는 순서▼
① 출생과 성장
② 위대한 기록자
③ 코스모폴리탄
④ 감각의 전도사
⑤ 탁월한 벤처사업가
⑥ 맛의 로맨티스트
⑦ 유행을 선도한 베스트 드레서
⑧ 타고난 예능적 기질, 넘치는 끼
⑨ 신념에 찬 계몽주의 사상가

자유의 날개를 달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카사노바. 그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 보는 기획시리즈를 주 1회 마련한다. 고향 베니스로부터 젊음을 불태웠던 로마와 파리, 말년을 보냈던 체코 보헤미아까지 그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카사노바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필자는 지난 10여년간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서양고서를 수집하면서 유럽 문화에 심취해 온 김준목씨(39·서양고서전문사이트 ‘안띠꾸스’ 대표).

김씨는 이탈리아 프랑스 체코 등 유럽 현지를 직접 찾아 카사노바의 흔적과 그 주변 이야기, 각종 관련 자료 등을 심층 취재했다. 김씨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카사노바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고 우리 삶의 영원한 화두인 자유와 낭만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다”고 말했다.<편집자>

①출생과 성장

아드리아해의 진주 베니스. 수많은 섬과 섬, 건물과 건물 사이로 바다인 듯 길인 듯 물이 흐르고, 배들이 비껴 가는 곳. 물위에 떠있는 듯 보이는 옛 건물 사이로 갈매기가 오가고 석양의 따사로운 햇살이 빨래줄처럼 드리우는 곳.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끼(?) 하나로 불멸의 이름이 된 카사노바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게 무엇 있으랴.

도시국가 베니스는 수백년동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무역을 기반으로 많은 부를 축척하고 군사 경제면에서도 막강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카사노바가 살았던 18세기 베니스는 옛 영화를 잃고 이미 퇴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부패와 쾌락이 팽배하고 간신히 공화정의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 부조리한 사회에서 카사노바는 자신의 자유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았다.

#희극배우의 아들…평생 괴롭힌 열등감

베니스 산사무엘성당의 뒤 뜰로 돌아가는 길모퉁이 건물에는 카사노바가 살았던 곳임을 알리는 명판이 붙어 있다. 이 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카사노바라는 한 전설적인 남자의 체취를 느낀다.

지아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그는 1725년 4월 2일 이곳에서 희극배우였던 아버지 자에따노 지우세페 카사노바(Gaetano Giuseppe Casanova)와 어머니 자네타(Zanetta)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연극배우 아들이라는 출생 환경은 카사노바에게 커다란 부담감으로 평생을 따라 다녔다. 이러한 열등의식 때문에 훗날 그의 저서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Ne amori Ne donne 1783)’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당시 극장 소유주였던 베니스의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Michele Grimani)라고 거짓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이 당시 정부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그는 베니스를 떠나야 했다.

#알몸 주술치료 '여인의 신비'에 빠지다

카사노바는 자서전에서 그의 삶을 여덟살때부터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부터 진정한 인간존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수많은 여인들과의 지치지 않는 사랑을 즐겼던 2m에 가까운 건장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유년시절 허약했다.

그는 여덟 살 때 코피가 늘 멈추지 않는 괴상한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잦은 해외공연으로 그를 돌볼 수 없었기에 외할머니 마르지아가 그를 양육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곤돌라(끝이 뾰죽한 긴 배)에 태우고 베니스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무라노 섬으로 갔다.

그 섬에서 주술사에게 넘겨진 카사노바는 하루 밤을 꼬박 상자에 갇혀 보내야만 했으며, 새벽에 아름다운 한 신비스런 여인으로부터 알몸으로 주술치료를 받았다. 이후 그의 몸은 점차 건강하게 되었고, 그녀로부터 전달된 여인의 신비감에 사로 잡히게 됐다.

#18세에 법학박사…학문 예능 두루 능통

카사노바는 이후 베니스 인근의 바도바대학을 다니면서 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그의 학습능력은 대단히 우수했다. 그는 고전어인 히브리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고 있었으며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다.

그는 학교로부터 시험만 보러와도 좋다는 말을 들었으며 친구들에게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팔아 필요한 것을 얻는 거래까지 했을 정도였다.

카사노바는 18세에 바도바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시절의 탄탄한 지식 습득은 훗날 그가 신분을 뛰어넘어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밑천이 된다. 그는 40여권의 저서를 남긴 탁월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천재성은 주변의 많은 여인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 주었다. 카사노바는 평생 상류사회로 신분상승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지식을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활용했다.

#자매 동시에 유혹…범상치 않은 첫경험

카사노바가 수학한 바도바대는 지금도 유럽의 명문 대학이다. 바도바대는 베니스에서 기차를 타고 20여분이면 도착한다. 학교벽에는 남녀의 성기를 패러디한 노골적인 그림과 에피소드가 적힌 대자보가 즐비하다. 이같은 바도바대의 전통에는 200여년전 선배 법학박사 카사노바도 한몫을 하는 것이 아닐는지.

18세기 젊은 엘리트들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사제나 군인이 되는 길이 있었다. 카사노바는 베니스 귀족인 알비세 말리피에로의 도움으로 1740년 2월14일 채발식을 하고 성직에 입문했다. 15세 때의 일이다. 16세 때 비잔틴 성당에서 첫 신학강의를 했고 하위 품직을 받은 뒤 추기경의 비서로까지 일을 했으니 카사노바의 첫 직업은 성직자였던 셈이다.

카사노바는 그러나 동정이었던 17세 때 한 자매를 유혹하게 된다. 두 여자를 동시에 유혹한 그의 첫 경험은 어떤 여인이든 상관없이 유혹하고 향락에 젖는 퇴폐적인 취향을 갖게 했다.

그 날의 일이다. 자매 중의 한 소녀가 그 앞에서 무너지려 할 때, 카사노바는 그 소녀의 처녀성을 감지하고 지켜줄 책임을 느꼈다. 그녀가 느낄 고통을 알기에 그녀를 그냥 두고, 그 옆에서 이미 이들을 지켜보며 달아오른 다른 소녀를 껴안았다. 카사노바의 사랑의 향연은 처음부터 독특했다.

어두운 밤 두 자매와의 사랑의 유희로 인생에서 처음으로 달콤한 충만을 맛본 카사노바. 이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감각적 본능과 자유로운 삶의 욕망으로 인해 그는 성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영욕이 기다리는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사제의 길에서 감각의 순례자로.

본능적인 선택이 자기 일생을 어떤 무늬로 수놓을지, 카사노바 자신은 알았을까, 몰랐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김 준 목(서양고서사이트 ‘안띠꾸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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