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키우는 아이들의 할머니 말투 흉내내기

  • 입력 2001년 5월 21일 18시 57분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던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던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
◇"뉘리끼리… 변또 …쓰봉…우리애 말투가 겉늙었어요"

“엄마, 이 김치 한번 ‘잡숴봐’.”

화장품 회사에 근무하는 김모씨(35·여)는 요즘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의 ‘할머니 말투’ 때문에 고민이다. 부부가 맞벌이인 탓에 할머니가 대부분의 시간을 자녀와 함께 보내고 있어 생겨난 현상이다.

“노란색을 ‘뉘리끼리’라고 하거나 ‘누르스름’하다고, ‘조그만’을 ‘쪼만한’이라고 표현하더군요.”

김씨는 할머니가 친구 분들과 농담하는 것을 들었는지 아이가 “할머니 나이가 6학년 3반이야?”라고 물을 땐 웃음이 앞섰던 게 사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할머니 말투’가 굳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는 서은정씨(33·여)도 시어머니인 ‘할머니’에게 자녀를 맡긴 경우. 도시락을 ‘벤또’도 아닌 ‘변또’라고 부르기도 하며 ‘샤쓰’ ‘쓰봉’ 같은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등 아이의 언어구사가 또래들에 비해 눈에 띄게 ‘복고풍’이다.

서씨는 “대학을 졸업한 할머니가 가끔 영어동화책을 읽어주시기도 하는데 구식 영어발음에 아이가 적응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 말투’를 사용하는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조부모에게 육아를 맡기는 가정이 많아졌기 때문. 먹을 것을 챙겨주고 다치지 않도록 보살피는 등 ‘단순육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인 교육’에 가담하는 할머니들이 늘고 있는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경기 분당신도시의 영어유치원 ‘팔스랩’의 양영아 원장(32)은 “원아 10명 중 2명 정도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등교한다. 할머니들이 수업에 참관하며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 등 어머니들 못지 않은 교육열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이순형 교수(아동가족학)는 “유아시절의 언어, 행동습관은 학교와 친구라는 사회화의 틀 속에서 단기간에 얼마든지 재정립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넓게 보아 자애로움과 여유가 있는 조부모의 교육스타일이 아이의 인성 감성교육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녀가 지나치게 ‘할머니 말투’를 구사하거나 응석이 심할 때는 그때그때 차분히 교정해 주되 아이 앞에서는 조부모의 교육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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