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살 길'은 없나…'서울대교수 성명' 계기로 본 실태

  • 입력 2001년 5월 21일 19시 06분


99년 'BK 21'사업 백지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전국의 대학교수 800여명의 모습.
99년 'BK 21'사업 백지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전국의 대학교수
800여명의 모습.
◇기초학문 인문학 죽어간다-돈이 안되면 철저히 외면하는 한국풍토

인문학에 대한 위기감이 또다시 고조되면서 학계와 대학가가 술렁거리고 있다.

서울대 인문, 사회, 자연대 교수 352명이 18일 ‘기초학문 위기’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인문학 위기 문제가 다시 학계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것. 호서대가 지망생이 없다는 이유로 철학과를 폐지키로 결정한 것도 인문학계에서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1990년대 중반 학부제 시행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인문학 위기 문제는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BK21사업과 ‘신지식인 운동’을 통해 인문학 교수들의 거센 반발로 연결됐다. BK21사업과 같은 국책 사업에서 인문학과 기초학문이 소외됐다는 학계의 불만이 터져나온 것.

이후 정부가 인문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학계의 반발이 일단 수그러들었으나 최근 이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인문학 위기가 어느 정도 심각하고 왜 하필 이 시점에서 터져나왔는가를 향후 전망과 함께 분석해 본다.

▽왜 다시 불거졌나〓인문학 위기에 대한 서울대 교수들의 이번 성명은 지난달 배포된 서울대 교직원수첩의 목차가 기존의 인문대 사회대 자연대 순에서 ‘가나다’ 순으로 바뀌면서 촉발됐다. 해당 3개 단과 대학 학장들은 “교직원 수첩의 단과대학 순서는 그 학교의 학문적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이에 반발, 학장회의 참석을 한달째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교직원 수첩 문제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인문학 교수들이 BK사업 이후 수년째 인문학에 대한 지원이 부진하고 학문 여건이 악화되자 다시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여기에 호서대가 철학과를 폐지하기로 결정한 것도 또다른 계기로 작용했다. 호서대에 따르면 98년 학부제 실시 이후 철학과를 선택한 학생이 99년 한 명도 없었으며 2000년 2명에 이어 올해에도 한 명도 없었다는것. 강제 배정과 그에 따른 휴학생 증가로 부작용이 일자 대학 측은 구조조정 차원에서 2001년부터 철학과 학생을 선발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인문학 위기의 실상〓정부는 기회있을 때마다 인문학 지원을 강조해 왔으나 분야별 연구비 지원 예산을 보면 인문학이 처한 위치는 쉽게 드러난다.

정부산하 43개 연구기관은 현재 5개 연구회로 편성돼 국무총리실의 관리감독을 받는다. 이 가운데 인문학 연구를 담당하는 인문사회연구회에는 9개 연구기관이 속해 있으며 올해 총 예산은 798억 5400만원, 이 가운데 정부출연금은 405억 3500만원이다.

반면 정부산하 연구기관으로 대표적인 응용기술 분야 연구소인 KIST의 경우 올해 총 예산이 1145억9600만원, 이 가운데 정부출연금은 501억 8100만원이다. 인문사회연구회 소속 9개 연구기관의 총예산을 다 합쳐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곳 보다 적은 것.

대학에서도 연구비 배정에서 인문학이 소외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최근 인문학 전공자들의 취업이 제대로 안되는 것도 위기감을 확산시키는 요인이다. 서울대 윤원철 교수(종교학과)는 최근 열린 한 세미나에서 지난 10년 간 서울대 인문대 석 박사 졸업생의 취업현황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통계에 따르면 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서울대 인문대학이 배출한 박사 수는 총 355명이며 이 가운데 정규 교수직에 채용된 사람은 123명(34.6%)에 불과했다. 91년부터 95년까지 같은 인문대학 박사학위취득자 152명 가운데 87%인 132명이 정규 교수직에 채용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인문학 위기의 파장〓이화여대 영문과 박찬길 교수는 “인문학에 기반하지 않은 응용학문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과 다름없다”면서 “타학문 발전의 기반 역할을 해왔던 인문학의 전통적 가치를 자본주의 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인문학이 경시될 경우 학생 전체의 교양 수준이 저하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허남진 교수는 “인문학 전공자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학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라면서 “학과마저 퇴출 위기에 있는 상황이라면 과연 전체 대학생에 대한 교양교육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결하나〓인문학 연구자들은 학문의 가치를 실적 위주로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인문학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데다 그 결과물도 가시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 특히 정부에서 인문학 육성에 대해 확실한 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권영민 인문대학장(국문학과)은 “1년에 몇 편의 논문을 썼는가를 잣대로 교수의 학문적 업적을 평가하는 현 체제 아래서는 1년 안에 가시적 성과물을 낼 수 있는 근시안적 연구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다”면서 “정부 당국이 제도적으로 인문학의 장기적 연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인문학자들 스스로 새로운 시대 흐름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이화여대 사학과 조지형 교수는 “인문학 위기를 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급변하는 세계 속에 인문학이 스스로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구태의연한 기존의 수직적 교육방식을 버리고 학생들과 수평적 의사소통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수경기자>sk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