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스트레스 등 시달려 건강관리에 남다른 신경
21일 오후 10시경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
홀로 남아 전화수화기와 씨름하는 남자가 있었다. 양손에 하나씩 든 수화기도 모자라 무릎 위에도 수화기를 걸쳐놓았다. 인터넷과 로이터통신 단말기가 쏟아내는 선물정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분주하게 수화기 3개를 옮겨다니며 선물거래를 중개하는 이 남자는 동양선물 해외선물팀장인 배정석씨(31). 낮과 밤이 다른 전세계를 무대로 벌어지는 선물거래의 특성 때문이다.
2교대 3교대 근무가 늘어나면서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9 to 5’가 깨어진 지 이미 오래. 세계화와 인터넷 보편화로 그동안 야근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밤에 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증권사와 투신사 직원들이나 인터넷 업체의 종사자들이 많다. 주요 시장인 뉴욕과 런던의 시차를 극복하는 길은 밤에 일하는 것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 또 ‘월드와이드웹(www)’을 24시간 단절 없이 운영하기 위해 야근은 ‘숙명’이다.
▽‘밤’에도 일하는 사람들〓삼성증권 리서치센터의 애널리스트 황찬영씨(29)의 근무시간은 오전 7시반부터 밤 12시까지. 외국인 투자자들의 문의가 많아지고 뉴욕증시를 반영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밤 늦게까지 남아 일한다. 서울증시가 뉴욕증시와의 동조화경향이 심해지면서 뉴욕시장의 등락이 국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물어오는 ‘간밤의 전화’도 많아졌다.
온라인 쇼핑몰 업체 ‘e-현대백화점’의 심석씨(28)는 자신이 담당하는 ‘e-슈퍼마켓’의 밤 매출이 개장 당시 10%대에서 최근 30%대로 뛰면서 야근하는 날도 부쩍 늘어났다. 쇼핑시간이 부족한 맞벌이 부부와 야근자들의 주문이 많기 때문이다. 사내에서는 “새벽 수박 주문이 왜 그렇게 많지?”라는 농담이 오갈 정도.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통신 인터넷운영국의 최흥덕 과장(44)은 “밤 인터넷 접속이 많아 네트워크 및 서버 관리가 중요해졌다”며 “400여명의 직원 중 10% 정도씩 매일 야근한다”고 말했다.
▽’밤’의 스트레스〓“입사 직후가 가장 힘들었어요. 무엇 때문에 남들 잘 시간에 일을 해야 하는지 후회도 많이 했고요. 한동안 불면증에 걸린 적도 있어요.”
동양선물의 배 팀장은 95년 입사 후 ‘글로벌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숱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평소 자신 있다고 생각한 영어였지만 주문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쩔쩔맸고 주문이 2개 이상 겹치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6년 관록이 쌓인 요즘은 나아져 5개월 주기로 한 달씩 야근하지만 팀장이라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회사에 불려나온다. 자연스레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 배씨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오후 3시경 집 근처 관악산에 올라가 1시간 정도 기(氣)수련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는 “젊은 사람이 평일 낮에 등산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아 애써 인적 드문 곳을 찾는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삼성증권의 황씨도 개인생활을 포기한 지 오래다. 이른 아침에 출근해 심야에 퇴근하기 때문에 건강에도 신경이 쓰인다. 황씨는 “일주일에 2번씩은 회사 근처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체력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밤’의 매력〓“세계 시장 동향을 빨리 파악하다 보니 남들보다 12시간 정도 앞서서 사는 것 같아요.” 밤에 대한 배씨의 넋두리는 어느새 ‘예찬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윗사람을 직접 접할 필요가 없어 근무 복장이 자유로운 것도 ‘밤일’의 강점. 또 남들과 거꾸로 살다보니 돈 쓸 일이 없어 돈이 굳는 것도 부수 효과라고 한다.
“가끔 재미있는 전화도 와요. 자기네 회사에서 단체 야유회를 가는데 직원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지원해 줄 수 없냐고 묻는 전화죠.” 덕분에 웃고 나면 한밤의 긴장이 풀리기도 한다.
‘밤일’에 나서는 그에게 생긴 고민 한가지. 팀원들은 모두 결혼했는데 정작 팀장인 자신은 아직 총각. “빨리 결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낮이 외로워서 더 이상 못살겠습니다.”
<차지완기자>marud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