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외로움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온 조경란(32·사진)씨가 새 장편소설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문학과지성사)를 냈다. 지난해 ‘이오에서 온 빛’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에 연재했던 작품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소설은 30대 초반 여성인 영어학원 강사 이강운과 그의 가족, 주변 인물들의 전생(前生)에서 이어지는 인연을 그리고 있다. 전생 체험, 불쑥 나타나는 부모의 영혼, 빙의(憑依·신들림)와 산 제물로 바쳐진 어린아이 미이라에 대한 에피소드가 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환상과 실제를 일부러 구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비주의 같은 것을 다루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옆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간의 전생 인연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그래서 주인공을 사랑했던 정신과 의사 김석희가 자살하게 된 이유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전생에 사랑했으나 그때도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김석희가 죽어서 다시 강운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라 ‘추론’될 뿐이다.
“불친절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생략이 많은 소설입니다. 이들의 전생에 어떤 관계였는지 시시콜콜하게 다 설명하는 건 작가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이 무슨 관계였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의 곁에 머물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지만 주인공은 절망의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조씨의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을 되살펴보게 만드는 따뜻한 힘이 실려있다.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잠시 사라진 것일 뿐. 지금은 잠시 헤어진 것일 뿐. 한번 인연을 맺은 영혼들은 거듭되는 생에서 다시 만날지니.’(271쪽·홀로된 주인공의 이같은 마지막 독백)
이 독백은 ‘사람들은 모두 한 줄기 빛’이라고 여기는 작가의 세계관에 다름아니다.
“문득 우리는 혼자라는 고독감이 치밀때가 있지만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의 인연으로 인해 겹겹이 얽혀있는 존재들입니다. 누구도 혼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고나서 흘깃 주변을 살펴보았으면 싶어요. 늘 거기 있으나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조씨는 소설속 주인공처럼 전생 체험을 시도해본 적이 있지만, 쉽게 최면에 빠지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자의식이 강하거나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혹은 마음을 열지 못하는 성격 탓이라고 진단했다. 전생에 무엇이었을 것 같냐는 질문에 그녀는 “재건을 꿈꾸는, 몰락한 나라의 우울한 공주 였을 것”이라며 웃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