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상학적 지평에서 규정한 선'펴낸 최경호씨

  • 입력 2001년 5월 28일 19시 03분


◇"목수의 손감각은 무아의 경지"

“낮엔 공사장에 나가고 아침 저녁으로 글을 씁니다.”

최근 ‘현상학적 지평에서 규명한 선’(경서원)이란 색다른 책을 출간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최경호씨(49). 최씨를 만나려면 경기 부천시 상동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을 찾아야 한다. 그는 여기서 목공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석사출신

“좋은 십장을 만나 행복하다”는 최씨는 서울대 철학과 73학번. 82년 같은 대학원에서 현상학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관련분야의 번역작업을 해왔다. ‘후설사상의 발달’ ‘신체의 현상학’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현상학적 운동 1,2’(공역)등 4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다. 그러나 번역만으로 생활이 될 리 없었다. 언젠가부터 공사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최씨는 학생시절 후설의 저작을 일일이 복사해 문단별로 잘라 오려내고 노트에 띄엄띄엄 붙여서 행간(行間)까지 읽겠다는 집념으로 현상학을 공부했다.

▽낮엔 공사장…아침 저녁 집필

“하나의 시를 알려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외워 시인의 마음이 돼야 합니다. 저는 현상학 이론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훗설의 마음을 따라가보려 했어요. 결국 훗설이 평생에 걸쳐 했던 작업이, 나라는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실재가 스스로를 내비치도록 하는 것, 즉 선험적 자아를 넘어서려 했던 시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90년대 들어 그는 선(禪)에 관한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97년 집안에 틀어박혀 보름 동안 죽기 살기로 선에 몰입한 후 나름대로 의식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고 그 체험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최씨는 주로 새벽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글을 쓴다. 해질녁까지 일하다 보면 저녁에는 녹초가 돼서 글 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공사가 많은 봄부터 여름까지만 일을 하고 그렇게 모아놓은 돈으로 가을 겨울을 지내면서 글을 쓴다. 그러나 ‘현상학적 지평에서 규명한 선’을 쓴 4년간은 예외였다. 1년 반 동안 꾸준히 공사판에 나가 생활비를 벌었다. 그리고 나서 2년 반 동안 오로지 집필에만 전념해 최근 책을 완성했다.

▽"모든 관념 버려야 참 自我 발견"

“끊임없이 뭔가를 지향하고 규정하려고 하는 선험적 자아를 뛰어넘어 무아(無我)에 이르려는 시도가 선입니다. 선험적 자아라는 능동적 의식주체가 사라진다고 해도 최소한 ‘몸’은 남습니다. 모든 관념을 버린,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아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아의 의식 속에 만물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 드러냅니다.”

최씨는 십장을 따라 오가는 단순한 목공에 불과하다. 하지만 “목수의 손감각은 머릿속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어느새 현대도시 속의 선사(禪師)가 돼 있다.

학생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한전숙(韓筌淑)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씨의 현상학적 지식은 국내 어느 전문가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하면서 “특히 돈의 속박에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철학하는 태도는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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