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동 '선수촌'의 잠 못 이루는 밤

  • 입력 2001년 5월 29일 19시 21분


◇유흥업 종사 2만여명 밤낮 꺼꾸로

옷가게 화장품점 등 24시간 성업

안녕하세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앞머리를 살짝 블리치해주세요.”

29일 ‘오전 2시’ 서울 강남구 논현초등학교 부근 주택가 H미용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성이 미용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함께 온 또 다른 여자는 ‘드라이’를 주문했다. 20분 뒤에는 미끈하게 잘 생긴 20대 초반의 남자가 커트를 요구했다.

같은 시간대 바로 옆 액세서리 전문점 링링(Ring Ring). 20대 초반 여성 2명이 귀고리를 고르고 있었다. 이내 맘에 드는 디자인을 찾았는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하고 잰걸음으로 문을 나선다. 링링 맞은편의 네일케어 전문점 ‘브로드웨이’에서는 서너명의 20대 여성이 의자에 앉아 손톱 관리를 받고 있다.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이 2만여명이나 밀집해 살고 있어 이른바 ‘선수촌’으로 불리는 논현1동의 심야 풍경이다.

▽24시간 숨쉬는 주택가〓술집 식당 사우나 찜질방 PC방 등 야간에 영업하는 곳은 흔하지만 미용실 옷가게 액세서리점 화장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업종이 24시간 성업중인 곳은 이 곳이 유일하다.

논현1동이 24시간 숨쉬는 ‘밤의 메카’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 88올림픽 이후 제일생명 4거리, 테헤란로 등에 고급 술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부터였다. ‘직장’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이 일대 원룸 주택을 중심으로 차례로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선수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곳은 엄밀히 말해 서초구 반포1동이었지만 이들을 상대로 한 24시간 상권은 논현1동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오전 2시부터 6시까지〓이 일대의 가게는 대부분 오전 9시반 문을 열었다가 다음날 오전 6시에 문을 닫는다. 청소하는 시간을 빼면 거의 24시간 영업하는 셈이다.

피크타임은 이 동네 여성들의 출근시간인 오후 6∼8시. 오후 9시부터 오전 1∼2시까지 공백시간이 지나면 오전 2시경부터 다시 대목을 맞는다. 오전시간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나이트클럽이나 호스트바에 가려고 몸단장하는 여성들, 그리고 이들에게 멋있어 보이려는 호스트들이 주요 고객.

29일 오전 4시 미용실을 찾은 정민지씨(23·가명)는 “담배 냄새, 술 냄새를 없애고 나이트나 호스트바에 가서는 부잣집 딸로 행세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심리”라고 말했다.

손님들의 ‘눈’이 높아 실력 없는 미용실은 금세 도태된다. 3년 전만 해도 20∼30개에 이르던 24시간 미용실은 현재 3개뿐. 하지만 하루에 최소한 500∼600명의 드라이 손님을 커버한다. 파마 손님은 거의 없다. ‘헤어스케치’의 김정희 원장(33)은 “드라이와 염색에 관한 한 전국 최고의 실력파들이 몰려 있다”고 자부한다.

▽전세 없는 동네〓전세가 없고 월세만 허용되는 것도 논현1동의 특징. 최근 월세를 선호하는 집주인들이 많아졌다지만 10년 이상 99% 월세만 받는 곳은 전국에서 이곳뿐이다.

20여년간 이 동네를 지킨 H부동산 김모 사장(60)은 “1000건을 계약해도 전세는 한 건 있을까 말까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 원룸으로 방 2개의 경우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60만∼150만원, 방 1개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100만원. 비싼 곳은 주로 고급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이 살지만, 지하 단칸방 등 싼 곳은 웨이터 차지다.

<이호갑기자>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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